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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시댁이야기.

원하지 않은 배려.

by 김부부

“나 집에 가고 싶어.”


남편이 비배우자 정자공유 시험관에 대해 거부를 하고 있는 상황이 길어지면서, 나는 점점 아이를 갖는 거에 대해 조금씩 내려놓아야 했다.


남편 쪽 즉 시댁은 가족행사가 많았다.


시아버지 형제가 9남매였고, 시어머니 쪽 형제가 5남매 대가족이다.


시부모님은 모든 경조사에 최대한 참석하셨고, 이때마다 큰아들내외인 우리 부부가 같이 참석하기 원하셨다.


경조사 참석 때마다 친인척어르신들은 임신에 대해 질문하셨고, 매번 난 어색한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해야 했다.


비슷한 시기에 결혼한 남편사촌들 이미 아이를 낳아 아이와 함께 참석했고, 끊임없이 임신소식을 들어야 했다.


더 이상 경조사에 참석하기가 괴로웠다. 하지만 시부모님은 나에 대한 배려는 없으셨고, 남편은 시부모님과 마찰을 만들기를 싫어했다. 결국 나만 참으면 되는 일이었다.


참다 참다 부산까지 끌려내려 간 누군지도 모르는 사촌결혼식에서 난 공황이 왔다.


갑자기 속이 울렁거리면서 과호흡이 왔다. 급하게 건물 비상구 계단으로 도망가 혼자가 돼서야 호흡이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호흡이 정상적으로 돌아온 순간 눈물이 터져 나왔다.


‘나는 왜 여기 있지?’

‘난 왜 여기 있어야 하지?’


집에 가고 싶었다. 나한테 제일 안전하다고 느끼는 최고의 장소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내가 없어진 걸 알고 나를 찾아온 남편은 내가 왜 이렇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왜 울어?”


“집에 가고 싶어.”


“지금 집에 어떡해 가?”


“여기 있는 게 너무 힘들다고, 집에 가고 싶어.”


펑펑 울면서 집에 가고 싶다고 남편한테 애원하는 사이에 없어진 남편을 찾는 시부모님 전화가 계속 오고 있었다.


“우선 진정하고, 지금 서울을 어떡해 가?”


“왜? 왜? 못 가는데!!!”


집에 못 간다는 남편한테 나는 소리를 지르며 발악을 했다.


“나보고 어떡하라고!”


시부모님과 나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남편도 화를 내기 시작했고, 난 아예 예식장 건물밖으로 나와 버렸다.


오로지 내편을 들어주지도, 나를 이해해주지 않는 남편이 너무 싫었다.


하지만 아직 착한 며느리병 걸려있던 나또한 결국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1박 2일 일정을 다 마치고 시부모님과 같이 서울에 올라와야 했다.


이 일 이후로 남편은 경조사참석을 최대한 본인 혼자 참석하려고 노력했다.


남편에게는 우리보다 약 일 년 먼저 결혼한 여동생이 있었지만, 여동생 또한 나에? 우리 부부에 대한 배려는 없었다. 시부모님이 그렇게 만들 거 일수도 있지만.


친인척 경조사 말고도 시부모님은 한 달에 한 번은 어떡해서든 가족 다 같이 식사하는 자리를 만들었고, 그게 안되면 우리 부부만이라도 참석해서 밥 먹는 자리를 만드셨다.

여동생부부에게는 결혼 일 년 차에 낳은 딸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식사약속 당일에 참석을 취소하거나, 매번 늦게 도착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시부모님에게 항상 똑같은 말을 들었다.


“아이가 없는 너희가 이해해라.”


이 말은 모든 상황에서 프리패스 통행권처럼 활용되었고, 남편 여동생도 특혜처럼 사용했다.


시부모님과 여동생은 아이가 없는 우리 부부를 매사에 가르치는 행동과 언행을 하였다.


예를 들면


우리 부부가 조카 선물로 장난감을 샀는데 건전지를 따로 구매해야 하는지를 몰라서 조카가 바로 장난감을 가지고 놀지 못한 상황이 있었다. 그때 남편 여동생과 시부모님이 주고받은 대화 내용이다.


“오빠네가 아이가 없어서 이런 거를 모르네.”


“그르게!! 아이고~ 미리 확인을 했어야지! 하긴 아기를 키워 봤어야 알지.”


아이가 없는 우리 부부에 대한 차별은 점점 심해졌다.


내가 본인 여동생에 미움이 커져간다는 것을 알게 된 남편은 여동생네 부부와 만남을 만들지 않았다.


그러다 시부모님과 남편 여동생에 배려로? 여동생 둘째 임신소식을 출산 한 달 전에 알게 되었다.


그동안 남편 여동생은 안 만나도 시부모님과는 수시로 만났는데, 남편과 시부모님이 나를 가지고 논? 기분이 들었다.


이일로 남편과도 한동안 냉전을 가졌다.


배려를 해줘야 하는 상황에서는 배려를 받지 못하고, 원치 않는 배려를 받게 되는 상황은 점점 쌓여 갔고,


남편 여동생은 둘째 출산 후 이젠 아예 우리 부부에게 윗사람처럼 굴기 시작했다.


내가 이 모든 상황을 참으며, 그래도 시부모님에게 잘해드렸던 이유는 단 한 가지, 남편이 우리 부모님에게 잘해서 이였다.


하지만 점점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늘어났고, 이기적인 남편 여동생 행동과, 직설적인 시어머님 화법은 내 가슴을 계속 후벼 파놓았다.


계속 참고 지냈던 우리 부부는 어느 날 갑자기 더 이상 참기가 싫어졌고, 시어머님과 남편 여동생에게 사과를 요구했지만, 거절당했고, 차마 부모님과 절연을 할 수 없던 남편만 시부모님과 왕래하고 난 시댁과 절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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