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망가져 버렸다.
비배우자 정자기증까지 남편한테 계속 까이면서, 나는 점점 나의 정체성이 잃어 가고 있었다.
난 밖에서는 쿨한 딩크족이었고, 친정에서는 아이를 이제 원하지 않는 딸인척 연기했고, 남편한테는 조급하지만 기다릴 수 있는 여유가 있는 와이프처럼 굴었다.
나는 아닌데....
나는 그 누구보다 아이를 원하고 아이를 가지고 싶은 여자인데. 그 누구에도 마음 편히 티를 낼 수도 없고 터놓고 얘기할 사람도 없었다.
분명 재미있는 티브이프로그램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눈물이 나는 일들이 늘어났다.
하다 하다 가만히 길을 걷다가도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일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마음에 고장이 났다.
마음의 고장과 함께 몸에도 고장이 나기 시작했다.
급성 위염으로 응급실에 실려가는 빈도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왕복 3시간 걸리는 회사 수업일정이 끝나갈 즈음에, 오래전 근무하던 회사에서 좋은 이직제안을 받고 이직을 했다.
학생대상이 아닌 성인대상으로 전국각지로 출장수업일정을, 다니면서, 회사에서 더 좋은 대우를 받기 시작했지만, 더 이상 버터낼 체력이 되지 못했고, 커리어를 포기하고 퇴사하고 본격적인 고립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한동안 정말 집에서 아무 곳도 나가지 않았다.
친정부모님이 체력적으로 힘들어하는 나를 위해, 당시 다리가 아프던 반려견을 데려가 케어를 해주셨다.
반려견 병원 가는 일정이 없어지고 나니, 난 정말 외출할 일이 전혀 없어졌다.
필요한 부분은 퇴근길 남편에게 부탁하고, 택배로 주문하고, 집 밖에 나가지 않았다.
이런 나를 위해 남편이 쉬는 날 나를 억지로 끌고 나갔지만, 가라앉은 나에 컨디션은 당최 돌아올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 시기 많은 것들이 변한 거 같다.
친구, 지인 만남도 경조사 외엔 없어졌고, 집순이가 되었다.
술도 집에서 혼자 마시는 게 편해졌고, 혼자 집에서 노는 게 편해졌고, 그냥 혼자가 편해졌고, 그냥 혼자가 제일 편했다.
거짓말할 필요도 없고, 안 괜찮은데 괜찮은 척 하지
않아도 되고, 그냥 혼자 있는 게 제일 마음이 편했고, 안전하다고 느꼈다.
유일한 친구라곤 이젠 남편밖에 없어져 버렸다.
살면서 나 자신이 제일 무기력하다고 느낀 시기 중에 최고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난 참 독립적이고 활발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혼자 결정해서 미국 인턴쉽도 갔다 오고, 혼자 해외여행도 다니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좋아했는데...
이젠 그런 나는 없어져 버렸다.
내가 너무 짠했다.
나 자신이 불쌍해서 많이 울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
타인이 나를 불쌍하게 만든 적은 없었다.
이 모든 상황은 내가 스스로 만든 거다.
내가 괜찮은 척 안 했으면 되었고, 마음을 터 넣고 위로도 받고, 동정도 받고 그랬으면 되었는데, 내가 나를 이렇게 만든 거다.
난 내가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한없이 작은 사림이었던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