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붙잡고 있던 솔비 씨가 내 손을 놓았다.
수능을 죽 쑤고 대학 입시 문제로 골머리를 썩고 있던 어느 날 밤, 선배 언니로부터 전화가 왔다. 00 방송 전문대 방송연예과가 있는데, 재단이 탄탄하고, 커리큘럼과 교수진이 훌륭하여 졸업 후에도 비전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게다가 연예인들도 학교에 다니기 때문에 학교 생활도 무척 재밌을 거라고 덧붙였다. 선배언니는 재학 중인 대학교를 그만두고 입시를 준비할 거라며, 나에게도 원서를 넣어 보라고 꼬셔댔다. 창극 뺑파 전의 여운이 남아 있던 터라 언니의 제안을 바로 받아들이고 언니와 함께 실기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나, 솔비 씨에게 방연과에 지원했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해서, 판소리과 4군데에만 입학원서를 넣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며칠 뒤, 결과가 하나, 둘씩 나오기 시작했다. 지방의 한 판소리과에서는 예비 합격, 나머지 학교들은 모조리 탈락. 솔비 씨는 망연자실했지만 나는 좌절하지 않고 마지막 발표를 기다렸다. 그리고 드디어 방송연예과 발표 날. 고3 내내 연습 한 뺑파 전의 뺑덕이 연기를 펼친 나는 무려 26:1의 경쟁률을 뚫고 00 방송 전문대 방송연예과에 합격했다! 합격자 발표를 확인하고 방방 뛰던 나를 보고, 솔비 씨는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너 그 학교 원서 냈었어?"
"엄마, 내가 26:1 뚫었다고! 내가 뺑덕이가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냐고?"
사실, 내가 대학교 문턱에도 못 가볼 줄 알았던 터라 솔비 씨의 큰 반대는 없었다. 하지만 배워놓은 판소리가 아까웠던 건지, 솔비 씨는 며칠 동안 회유와 설득을 반복했다. 그리고도 꺾이지 않는 내 결연한 의지를 보더니, 결국 솔비 씨는 절대로 후회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라는 말을 끝으로 등록금이 든 통장을 내미셨다. 그렇게 00 방송 전문대 방송연예과에 입학했다.
학교에는 TV에서 보던 유명 연예인들이 있었다. 물론, 일반 학생들과 똑같은 생활을 하진 않았지만, 생각보다 학교에 자주 얼굴을 비췄다. 처음엔 연예인들을 보고 '우와 진짜 TV에 나오던 연예인이야!' 하고 놀랐으나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척, 연예인이랑 노는 게 별거 아니란 식으로 연기를 했다. 사인받고 싶던 손은 주머니에 넣고, 평온한 표정을 유지했다.
학교에는 연출이나 감독과 같은 스태프가 되고 싶은 친구들도 있었고, 데뷔를 앞둔 연예인 지망생들도 있었다. 그 친구들과 비교하면, 내 외모는 전혀 특별하지 않았지만, 밝고 싹싹한 성격, 잘 발달된 사회성 덕분에 날 좋아하는 사람이 많았다. 선후배는 물론, 다른 과 친구들, 다른 학교 친구들, 모두와 어울렸고, 나날이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배운 건 예쁘고 잘생긴 애들은 대부분 내성적이며, 나 같이 성격 좋은 친구가 다가가면 마음을 바로 연다는 것이었다.
여자 친구들이 술자리에 날 부르면 “응, 기다려, 친구 들이랑 같이 갈게." 하고는 모델, 배우, 연예인 활동을 하는 남사친들에게 전화를 걸어 조를 짰다. 반대로, 남자들과 함께 있을 때는 예쁜 여자친구들을 소환해 자리의 퀄리티와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주선자의 입지를 다졌고, 술자리의 공인중개사로 등극했다. 소문 때문이었는지, 어느 날은 기획사 대표님까지 자리에 함께 했다. 덕분에 영화를 리뷰하는 리포터, 스타 지망생의 하루 같은 케이블 방송 활동도 잠시나마 경험했다.
게다가 판소리로 다져온 탄탄한 기본기로 누구의 어깨 든 들썩이게 만드는 노래 실력, 대가족 속에서 자동 업그레이드된 애교 스킬, 그리고 강남 초·중·예고 졸업으로 쌓은 부자 인맥과 예술인 인맥들까지.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나는 그 시절 꽤나 특별한 사람으로 비춰졌 던 거 같다. 왜냐하면 명품 선물은 기본이고, 심지어 나를 만나기 위해 돈을 지불하는 사람들까지 생겼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20살 밖에 안 된 내가 가진 에너지와 인맥, 그리고 영향력은 상당했다. 만약 그 시절의 열정과 지금의 정신력이 더해졌다면? 아마도 기획사 대표, 초대형 이벤트 회사, 아니면 강남의 마담뚜로 떡상했을지도 모른다.
슬프게도 내 20살은 그런 열정도 정신력도 없었고, 뽀로로병에 걸려 노는 게 제일 좋았다. 그렇게 20대의 화려한 시간이 덧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대학교 졸업반. 인기도 많았고, 다른 친구들보다 풍요로웠지만, 허상을 쫓았던 탓 인지 주위에 사람이 많았어도 , 참 외로웠다. 어떤 노래 제목처럼 내 삶은 ‘풍요 속의 빈곤’이었다.
그렇게 외롭고 공허했던 어느 날, 한 남자를 만나게 되었고, 얼마 되지 않아 그 남자, 경(가명)과 사귀어보기로 했다. 남자답고, 웃기고, 귀여운 그에게 콩깍지가 단단히 씌었다.사랑을 모르던 나의 세상이 변하기 시작했다. 내 눈에 오직 그 사람만 보였고, 세상이 그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듯했다. 아니 돌아갔다.
내가 쌓아온 인맥들도 슬슬 버거워졌다. 자고 나면
100통이 넘게 찍혀 있는 부재중 전화, 끊임없는 약속들, 그 모든 것들이 더 이상 의미 없이 느껴졌다.
결국,잠수를 탔다. 예고, 예대, 강남에서 이어졌던 모든 인연을 지우개로 지워내듯 싹싹 정리했다. 간간히 하던 방송 일도, 판소리 알바도 그만두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던 냥, 그 사람 곁에 있는 것을 택했다.
그리고. 인생 처음으로, 늘 끈질기게 나를 붙잡고 있던 솔비 씨가 내 손을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