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도 없고, 사는 곳도 없고, 빚만 진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방송연예과를 졸업하고 솔비 씨의 그늘에서 벗어나 친구와 자취방을 얻었다. 독립을 해보니, 뭐든 내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고, 사랑도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내가 진정한 어른이 된 것 같아 좋았다. 하지만 좋았던 것도 잠시. 금전적인 문제나 전반적인 가사 등 책임져야 할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전공을 살리지 못해 전문 직종에서 일할 수 없었기에 이일 저 일을 기웃거렸지만, 일반 직장을 구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결국 온갖 알바를 하며 금전적인 부분을 해결해야 했다.
낮이나 주말에는 마트에서 행사 아르바이트를 했고, 저녁에는 친구를 따라 사행성 오락실에서 일했다. 오락실에서 내 역할은 잭팟이 터진 고객 뒤에서 탬버린을 치며 축하 멘트로 분위기를 띄우는 것이었다. 나의 걸쭉한 목소리와 특유의 비비는 기술 덕분에 팁도 많이 받았고, 날 기억해 주는 손님들도 늘어났다. 사장님은 그런 나를 좋게 봤고 전국에 새로운 매장이 오픈할 때마다 오픈 멤버로 투입시켰다. 그렇게 지방을 오가는 일정이 잦아지면서 친구와 함께 살던 자취방의 월세가 아깝게 느껴져 결국 집을 정리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지방 출장이 줄어들면서 서울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났고, 다시 단기 렌트를 해야 해서 지출은 더 커졌다. 짐을 둘 곳도 없고 생활은 점점 더 불안정해졌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남자친구를 사귀면서 친구들과 연락을 끊었지만, 몇몇 친구들과의 인연은 이어나갔었다. 특히 대학교 시절부터 절친이던 운이 오빠와는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았다. 당시 공익근무요원이었던 오빠는 대전에 살고 있었는데, 내가 사는 이야기를 듣더니, 대전에서 월세 60만 원짜리 투룸을 얻어 같이 살자고 했다. 오빠 얘기를 듣자마자, 주말에는 대전에서 지내고, 서울에 올라가면 남자친구 집에서 머물거나 지방 출장을 가니까 너무 괜찮을 라고 생각했다. 월세 30 만원도 큰 부담도 아닐 것 같았고, 오빠와 함께라면 지루할 틈 없이 즐거울 거라는 기대감마저 들어 깊게 고민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막연한 확신만으로 곧바로 짐을 싸서 대전으로 이사를 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현실은 내 상상과는 너무 달랐다. 우리 둘은 어렸고, 미성숙했고, 경제적으로는 바닥을 치던 시기였다. 돈 문제는 어김없이 얽혔고, 그 얽힌 문제들은 결국 싸움이 되었다. 남매처럼 친했던 우리 사이에 날카로운 말들이 오가고 서운함이 쌓였다. 대전에서의 생활은 두 달 남짓. 결국 더는 버티지 못하고 집을 나왔다. 하지만 집 계약은 남아있었기 때문에 집을 나오고도 월세는 계속 나갔고, 그렇게 반년이 흐른 뒤에야 그 집을 정리할 수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빨리 집을 정리한 덕에 우리 관계는 시간을 두고 회복할 수 있었다는 거다. 문제는 어리숙한 결정들과 벌여놓은 일들의 여파로 카드 빚이 쌓여 결국 신용불량자가 되었다. 나름대로 일도 해보고 잘 살아보려고 발버둥 쳤지만, 되는 일도 없고 운은 왜 그렇게 없는 건지. 솔비 씨 말 안 듣고 내 멋대로 하다 결국 코가 석 자나 빠진 꼴이었다.
몇 년 동안 나는 가족들에게도, 가끔 만나는 친구들에게도 내 속사정을 숨겼다. 마치 잘 지내는 척, 아무 문제없는 사람처럼 보이려고 애썼다. 솔비 씨에게도 내가 잘 지내고 있다는 거짓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현실은 신용불량자에, 이 일 저 일 닥치는 대로 하는 n잡러로,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한 떠돌이였다.
울고 싶도록 초라한 날들도 많았다. 무력감에 짓눌려 잠들지 못한 밤도 있었고, 스스로를 원망하며 왜 이렇게 됐는지 끝없이 되뇌던 순간들도 셀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도 내가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였다. 몇 년간 함께해 온 사랑하는 남자친구.
그는 내 삶의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비록 우리의 삶은 버거웠지만, 그의 존재는 어떤 일이든 해낼 용기를 주었다. 나 스스로가 부끄럽고 초라해질 때도, 그는 항상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며 묵묵히 내 곁을 지켰다. 덕분에 나는 힘을 냈고, 비틀거리며 나아갈 수 있었다.
어느 날 밤 집에 있었는데, 남자친구가 술을 한잔 하자고 했다. 기쁜 마음으로 술상을 차리고 주거니 받거니 소주 한 병 즈음 마셨을까? 남자친구가 반짝이는 두 눈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나 만나보고 싶은 여자가 생겼어."
주먹으로 귀를 세게 얻어맞은 거 같이 주변 소리가 안 들렸다. 당황해서 눈물이 났지만 왠지 그를 붙잡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 거 같아서 눈물을 참고 물었다.
“왜 내가 아니고 그 여자여야 되는 건데?”
남자친구가 덤덤히 말했다.
"그 여자가 사업자금을 대준다는데 너는 그 돈 없잖아. 그러니까 나 그 여자한테 갈게. “
할 말이 없었다. 빚만 있던 나는 그를 차마 붙잡을 수 없었다. 바보같이 마지막 까지도 그를 사랑해서, 그래, 너라도 잘 살아라 하고 그를 그녀(언) 에게 떠나보냈다. 내 모든 걸 다 버리고 택했던 내 사랑이 허무하게 하루아침에 끝났다.
“뭐 한 거냐, 너? 꿈은 왜 포기했던 거냐, 너? 이제 어쩔래, 너? 나 이제 어쩌지…?”
머릿속에서 나를 향한 질문들이 끊임없이 쏟아졌다. 그동안 보지 않으려 했던 현실이 마침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자 두려웠다. 도대체 지난 몇 년 동안 뭘 하며 살았던 걸까? 종이장처럼 얇디얇은 사랑 하나를 붙잡고 시간을 흘려보낸 걸까? 억울하고 후회되고 공허해서 며칠 동안 울고 또 울었다. 내가 선택한 사랑, 내가 선택한 삶이었기에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다. 결국, 나는 꿈도 없고, 사는 곳도 없으며, 빚만 진 사람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며칠이 지나고, 문득 거울 앞에 섰다. 울어서 부은 눈, 피곤한 눈빛, 정돈되지 않은 헝클어진 머리카락, 그리고 그 안에 숨어 있는 낯선 표정. 그 모든 것이 내가 아닌 것 같았다.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는 내가 불쌍했다.
그렇게 거울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그렇게 나는 나 자신과 마주했다. 대답을 찾을 수 없을지라도, 나에게 질문을 시작할 준비가 된 것 같았다. 그리고 나한테 진심으로 묻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