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방황의 시작-꼴찌 노리기.
예고에 입학하기 전 중학교 시절의 나는, 예고에 가기만 하면 긴 머리를 휘날리며 멋지게 학교를 다니고,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을 거라는 철없는 상상만 하였다. 그러나 막상 예고에 입학해 보니, 현실은 그보다 훨씬 치열했다. 예고는 국악을 사랑하는 아이들의 집합체였고, 선후배 간의 예의를 중요하게 여기며 국악인으로서의 자부심과 전공에 대한 열정이 가득한 곳이었다. 친구들은 각자의 전공에 몰두하며 매일을 치열하게 보내고 있었는데 실력 차이였는지, 낯설었던 건지, 그런 열정적인 친구들이 왠지 모르게 부담스러웠다. 그리고 내 눈에 나와 다른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친구들은 참 달랐다. 겉모습, 생활 방식, 전공을 선택한 이유까지 제각각에, 심지어 나이도_ 한 살, 두 살 차이는 물론, 다섯 살이나 많은 언니도 있었다. 지방에서 온 친구들은 자취를 하거나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이미 독립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런 모습은 나에게 묘한 동경심을 불러일으켰다. 집에 드나드는 남자 친구들이 있고, 마치 어른이라도 된 듯 행동하는 친구들이 어찌나 멋있어 보이던지, 나도 그 무리에 끼고 싶었다. 그들의 하숙집에서 모여 웃고 떠드는 친구들이 너무 부러워 나도 어떻게든 발을 들이고 싶었다. 솔비 씨의 김치를 퍼다 주고, 말투와 행동도 바꿨으며, 어른인 척, 다 아는 척 허세를 부리며 꾸역꾸역 무리 속에 들어갔다. 학교와 학원은 내가 가고 싶을 때만 갔고, 갑자기 어른이 된 냥, 모든 것을 내 마음대로 했다. 그런 내 모습에 속이 뒤집힌 솔비 씨가 한마디 하면, 백 마디로 받아치며 대들었다.
중간고사 때는 204명 중 178등을 했다. 성적표를 본 솔비 씨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차라리 꼴찌가 낫겠다!" 하며 한숨 섞인 호통을 쳤다. 반항심으로 가득 찼던 나는 기말고사 때 백지를 제출하는 것으로 의도적 꼴찌를 노렸다. 아이러니하게도 203등. 뒤에 한 명이 더 있었다. '누구냐 너.'
간당간당했던 출석일수와 함께 문제아로 찍힌 나는 솔비 씨를 더욱 절박하게 만들었다. 내가 학교에 가는 날보다 솔비 씨가 학교를 더 자주 간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솔비 씨는 담임 선생님을 찾아가 애타게 사정하고, 나를 포기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길 반복했다.
1학년 담임 선생님은 교육대를 갓 졸업하고 처음으로 담임을 맡은 젊은 선생님이었다. 내가 학교에 간 날이면, 선생님은 나를 붙잡고 “나는 절대 너를 포기하지 않을 거야.”라는 말로 시작해, “넌 결국 낙오자가 될 거야.”라고 이 말 저 말에, 회유와 설득, 때로는 협박 섞인 말까지 하며 나를 달랬다. 물론, 그때는 선생님이 하나도 안 고맙고 부담스러웠다.
2학년이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문제아로 불렸다. 하필이면 담임 선생님도 학교에서 악명이 높던 호랑이 선생님이었다. 엄격하기로 소문난 그 선생님은 내가 학교도 잘 나오지 않는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셨는데도, 나를 체육부장으로 임명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때는 내가 파워 J 인걸 몰랐음) 나에게 임무가 주어지자 묘한 의욕이 생겼다. 은근히 학교도 잘 나가게 되었다. 사실 선생님의 무서운 존재감도 한몫했다. 5월쯤인가, 체육대회 응원연습을 하다 반 친구들 4명과 친해지게 되었다. 그 친구들은 착하면서도 유머가 넘쳤고, 공부와 전공 연습도 철저히 하면서, 시험이 끝나면 놀 땐 누구보다 제대로 노는, 말 그대로 싸이의 강남스타일 가사에 등장할 법한 애들이었다. 그런 친구들과 어울리다 보니, 나도 자연스레 그들처럼 물들어 갔다. 그중에서도 가장 좋아했던 친구는 피리 소녀 영이었는데 신기하게도, 훗날 내가 미국에서 가장 큰 고비를 겪고 있을 때, 연락이 끊겼던 영이와 다시 만나게 됐다. 지금 생각해도 내가 영이를 가장 좋아했던 건 내 인생에서 손에 꼽을 만큼 잘한 일이다. 나는 그렇게 모두의 노력과 사랑 덕분에 방황을 멈추고 서서히 제자리로 돌아오게 되었다.
3학년 담임 선생님은 열정과 예술적 재능이 넘치는 분이셨다. 선생님의 야심 찬 꿈은 우리 반 기악, 타악, 성악 전공자들이 힘을 합쳐 창극 공연을 직접 준비하고 무대에 올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건 어디까지나 선생님의 꿈이었지, 우리의 꿈은 아니었다. 하지만 선생님은 꿈을 현실로 만들겠다는 의지 하나로 여기저기 제안서를 쓰고, 제출하고, 또 제출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제안서가 통과되었고, 선생님이 뛰어와서
“제안서가 통과됐어!”라고 외치셨다.
우린 그렇게 과천에 있는 극장에서 공연을 올릴 기회를 얻게 되었고, 선생님의 지휘 아래 본격적으로 창극 준비에 돌입했다. 주인공을 뽑기 위해 성악과 학생들 전체가 오디션에 참가했다. 솔직히 내 판소리 실력은 중간 이하였지만, 주인공 캐릭터를 웃기게 각색한 점이 높게 평가되어 당당히 주인공이 되었다. 그날부터 창극 연습에 몰두했다. 판소리 대목을 연습하고, 극 중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수없이 연습하자, 점차 "문제아"라는 꼬리표 대신 "연극 주인공"이라는 새로운 이미지가 생겨났다.
3학년 마지막 학기, 우리는 창극 '뺑파 전’을 무대에 올렸다. 무대 위에서 펼쳐진 합주, 노래, 연기는 우리의 모든 노력을 담아냈고, 공연이 끝난 후 관객들의 뜨거운 박수로 그 가치를 증명받았다. 그날 이후 내 예고 생활은 "비행"이 아니라, "비상"으로 다시 기록되었고, 나의 3학년은 그렇게 화려한 막을 내렸다.
그리고 연극이 너무 성공적이었던 나머지.... 솔비 씨 몰래 전통 판소리를 그만 두기로 결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