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생의 비애
솔비 씨는 내가 일곱 살이 되던 해, 초등학교에 입학시켰다. 그 시절엔 부모님이 "얘를 7살에 학교를 보낼까? 아니면 8살까지 집에서 좀 더 굴릴까?"를 결정하던 시기였다. 솔비 씨는 과감히 7살 선택 버튼을 눌렀다. “빨리 학교 보내서 똑똑하게 만들자!”라는 원대한 목표가 있으셨던 것 같다.
학년은 같았지만 나보다 거의 한 살이나 많은 친구들 틈에 끼어 시작된 학교생활은 사회성, 집중력, 학업 능력 등 거의 모든 면에서 차이가 났다. 알림장을 빠르게 못 적어서 숙제를 못 해가거나, 준비물을 안 가져가서 솔비 씨한테 혼나기 일쑤였던 나는 나름 남에게 ‘비비는 법’을 터득했다. 친구들에게 애교를 부리니, 숙제는 물론 연필 깎는 일까지 척척 해결되었지만 성적 향상은 안되고, 애교만 향상된 건 비밀. 그렇게 잘 비빈 덕분에 솔비 씨의 간섭 없이 그럭저럭 2학년이 지나갔다.
그러나, 내가 3학년이 되었을 때도 솔비 씨가 기대하던 똘똘한 끼는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자, 솔비 씨의 불안이 폭발했다. 그리하여 시작된 대장정—학원 순례
글짓기, 수학, 영어, 피아노 학원을 전전하였지만, 큰 발전은 없었다. 수학 시간에는 여전히 손가락을 사용했고, 선생님의 다크서클은 진해져 갔다. 먹을 궁리만 하던 나는 글짓기 시간에는 먹는 것에 대한 시를 썼고, 영어 시간에는 벙어리가 되어 미국에 안 가면 영어 쓸 일이 없을 테니 가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피아노 시간만 되면 음표들은 마치 외계어처럼 보였고 악보를 못 읽어서 건반 위에서 길을 잃은 내 손가락을 바라보곤 했더랬다.
솔비 씨는 행동파였다. 녹색 어머니 활동에 나가 학교 앞 횡단보도를 지켰고, 학부모 모임에선 육성회장직을 맡았다. 그뿐인가? 나를 반장 선거에까지 내보냈다. 반 친구들 앞에서 나는 자신감 있게 외쳤다.
“나를 반장으로 뽑아주면 너희들의 손과 발이 될게. “
결과는… 처참했다.
솔비 씨는 점점 깊은 한숨을 쉬기 시작했다. 그러나 포기란 그녀의 사전에 없는 단어였다. 나는 여전히 뒤처진 채 4학년을 맞았고, 솔비 씨가 드디어 결단을 내렸다.
“이사 간다! “
그 당시 그녀의 머릿속은 새로운 동네 = 새로운 희망이라는 단순한 방정식으로 가득했다.
“강남 + 교육 = 똑똑한 아이로 변신!”
그렇게 우리는 강남 8 학군에 입성했다.
솔직히 당시의 나는 ‘강남 8 학군’이 뭔지도 몰랐다. 그저 “아, 이사를 가는구나.” 정도로 가볍게 여겼다. 그때 강남이라는 동네는 알지도 못했지만, 곧 나는 강남 8 학군은 내가 쉽게 비벼 볼 수 있는 곳이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강남 초등학생들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내가 본 5학년 친구들은 초등학생이 아니라 중학생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말투도 어른스러웠고, 일부 아이들은 이미 이성교제를 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 당시 야광 아이템이 강남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대유행이었다. 야광색 티셔츠, 야광 신발 끈, 야광 필통… 뭐든 야광이면 끝판왕 취급을 받았다.
“엄마! 나도 야광 옷 사줘요!”
솔비 씨는 내 요청에 어이없어했지만, 강남에서 야광 없이 산다는 건, 곧 소외를 의미했으니 솔비 씨는 형형색색의 야광 아이템을 풀장착 시켜줬다.
그날 이후, 나는 비로소 강남 초등학생 세계에서 간신히 소속감을 얻었다.
하지만 문제는 공부였다. 솔비 씨가 나를 강남으로 전학시킨 이유는 공부 때문이었는데, 친구를 사귀기 위해 공부 대신 서태지 춤을 연습하며 시간을 보냈다.
“난 알아요~ 이 밤이 흐르고 흐르면~”
덕분에 친구는 사귈 수 있었지만, 성적은 추락의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긍정이 체질인 솔비 씨는 희망의 끈을 잡으며 말했다.
“중학생이 되면 똘똘해질 거야.”
그리고 드디어, 강남 8 학군에서도 손꼽히는 명문 중학교에 입학했고 솔비 씨가 원하던 운명적 만남을 하게 된다. 솔비 씨의 소원이 간절했을까? 솔비 씨의 소원이 아주 격하게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