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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Da Nov 14. 2024

내 가족을 소개합니다.

천진난만 막내의 생존기

내가 자라온 환경과, 가족을 소개하는 것이 내 앞으로의 여정을 이해하는 데 더 재미와 감동을 줄 것 같아, 나를 소개하기 전에 먼저 우리 가족을 소개 한다.


어린 시절 우리 가족은 원래 6명이었다. 전쟁을 겪고, 이일 저일 마다하지 않으셨던 우리 할머니는, 서울에서 자리를 잘 잡으시고는 “내 피붙이들도 서울 물 좀 먹어봐야 한다!”며 시골에 살 던 언니, 오빠들을 하나둘씩 우리 집으로 불러들이셨고, 내가 10살이 될 무렵에는 총 12명의 친척들이 함께 살게 되었다.


우리 할머니는 사랑이 넘치셨지만, 성격은 불같으셨다. 대가족이 함께 있으면 마냥 행복해 보였지만, 그 이면에는 할머니의 성격 탓에 보이지 않는 긴장감이 항상 감돌았다. 반면, 할아버지는 온화하고 착한 분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할머니 말씀에 복종하던 그 착한 할아버지는 마냥 착한 남편은 아니었던 거 같다. 밖으로 도망치기 위해 어린 나를 데리고 이 산 저 산을 누비셨던 걸 보면 말이다. 덕분에 나는 할머니에게서 강철 멘탈을, 할아버지에게서 강철 체력을 얻었다.


엄마는 센 할머니에게 혹독한 시집살이를 당했지만, 그 와중에도 기세 등등 하고, 대차고, 지혜로워서 며느리 역할을 완벽히 해냈다. 정은 또 얼마나 많은지 김장 100 포기를 하면 그중 30 포기를 불우이웃에게 나눠 주었고, 리어카에서 바나나를 팔지 못해 집에 못 들어가는 할머니를 보고는 그 바나나를 몽땅 사주기도 했다. 엄마는 흔히 떠올리는 전통적인 엄마의 모습보다는, 대범함과 카리스마가 있었다.


엄마의 가명은 "솔비"다. 왜 솔비냐고? 엄마가 고스톱에서 솔과 비가 들어오면 그렇게 기분이 좋다며 스스로 지은 이름이다. 철없는 막내를 그토록 못 믿는 솔비 씨의 특이점 중 하나는, 나를 못 믿으면서도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는 절대 "NO"를 안 하고 항상 “해봐!”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덕분에 나는 돌다리를 두드리기는커녕 막무가내로 건너 보며 살았다. 물론, 그 결과 내 인생은 롤러코스터 저리 가라 할 만큼 굴곡졌지만, 대신 엄청난 경험치를 얻었다. 지금도 내가 무언가 새로운 도전을 하려고 하면 솔비 씨는 변함없이 이렇게 외친다.


“못 먹어도 고(go)야! 해봐!”


아빠는 대기업에서 일하셨고 늘 바쁘셨다. 내 기억 속 아빠는 무뚝뚝의 화신 이자, 엄격함의 아이콘 같은 분이었다. 어린 시절에 "아빠랑 마주치면 혼난다"라는 공포감이 있었지만, 이 나이 되고 보니 아빠가 왜 그리 말수가 적고 무뚝뚝 했는지 이해가 간다. 고부간 갈등을 중재해야 했고, 어린 친척들을 챙겨야 했으며, 회사 업무에, 가장의 무게까지 지었으니. 아빠에게서 그 흔한 농담과 웃음이 나왔겠는가. 그리고 지금은 안다. 묵묵히 그 역할을 해내신 아빠 덕분에 지금껏 걱정 없이, 돌다리를 건너는 삶을 살 수 있었다는 것을.


언니와 나는 1살 차이밖에 안 나지만, 어릴 때부터 언니는 외유내강 그 자체였다. 맞벌이하시던 부모님을 대신해 조부모님이 우리를 돌봐주셨고 언니와 나는 무서웠던 할머니 말씀을 잘 들었다. 그런데 그 어린 5살짜리 언니에게서 어떻게 그런 내공이 나왔던 건지, 할머니가 엄마를 구박할 때면, 평소 조용하던 언니가 돌변해 앙칼지게 엄마 편을 들었다. 솔비 씨는 어린 딸에게 보호 아닌 보호를 받았고 "할머니한테 그러는 거 아니야"라고 호통 치면서 은근히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 솔비 씨, 큰딸을 바라보던 눈빛에서 꿀이 뚝뚝, 철없는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서는 불이 번쩍였더랬다.

언니는 시집살이를 겪는 솔비 씨의 든든한 방패가 되어 일찍 어른이 되었고, 나는 그런 언니를 뒤에서 졸졸 따라다니는 철부지 동생이었다. 그런 성숙한 내 언니는 인생의 베프이자 모든 결정을 지지해 주는 든든한 조력자다.


함께 살던 친척 언니, 오빠들은 공장에서 일하느라 늘 바빴지만 퇴근하고 집에 오면 나랑 놀아주었고, 난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언니, 오빠들은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서도 치열하게 살았고, 내가 11살 되던 해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독립해 이사를 나갔다. 너무 슬퍼 눈물이 났지만, 한편으로는 "이제 드디어 내 방이 생기는 건가?"라는 은밀한 기대를 품었던 얄팍한 마음이 떠오른다. 어릴 적, 언니 오빠들과 쌓은 훈훈한 기억 덕분인지, 지금도 나는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걸 좋아한다.


7살 이전의 나는 끼가 넘치며, 정이 많았고 철없는 아이였다. 그저 천진난만하게 하루 종일 어떻게 놀지를 궁리했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마이클 잭슨 "Beat it"을  **삐레~~ 삐레~~**따라 부르며 방바닥에 스프레이를 뿌려 방바닥을 미끄럽게 만들고 양말 신은 발로 몇 시간씩  춤을 추는 건 기본. 인형놀이에 몰입해 인형들의 대하드라마를 연출하곤 했다. 놀 궁리만 해서 그랬는지, 크게 똘똘한 아이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말이 느리거나 유치원에서 문제아로 찍힌 적은 없는, 그저 평범한 아이였다. 그런데 이 평범함은 어디까지나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의 일이다. 7살에 학교에 들어가면서, 나의 천진난만하고 평범했던 일상은 갑작스러운 파국을 맞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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