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가족 막내의 삶

성격 형성의 시작

어린 시절 우리 가족은 원래 6명이었지만, 할머니는 형편이 어려운 친척들이 서울집에 와서 공장에 다닐 수 있도록 해주셨다. 언니 오빠들이 시골에서 하나둘씩 지내러 왔고, 내가 11살이 될 때까지 총 12명의 친척들과 함께 생활했다. 무척이나 강하셨던 할머니는 사랑이 많으셨지만, 성격이 불 같았다. 그런 할머니 기에 눌려서였는지, 할아버지는 온화하고 착한 분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당시 할아버지는 겉으로는 할머니 말씀을 잘 따르는 착한 남편처럼 보였지만, 아마 힘드셨던 것 같다. 할아버지는 어린 나를 데리고 이 산 저 산을 누비며 밖에서 시간을 보내는 걸 좋아하셨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강한 체력과 끈기는 할아버지 덕분이다. 

엄마의 가명은 솔비이다."솔비"는  고스톱을 좋아하는 엄마가 솔과 비가 들어오면 그렇게 기분이 좋다며 만든 이름이다. 솔비 씨는 센 할머니에게 혹독한 시집살이를 당했지만, 기세 등등 하고, 대차고, 지혜로운 성격으로  며느리 역할을 잘 해냈다. 그 와중에도 정이 많아서 김장 100 포기를 하면 그중 30 포기는 불우이웃에게 나누어 주었고, 추운 겨울날 리어카에 남은 바나나를 팔지 못해 집에 못 들어가는 할머니를 보고 안쓰러워하며 바나나를 전부 사주기도 했다. 솔비 씨는 흔히 생각하는 전통적인 엄마의 이미지랑은 좀 거리가 멀었다. 내가 자라면서 가장 의지한 사람이지만, 좋아하면서도 무섭기도 했어서 가장 가깝다고 할 수는 없었다. 철없는 막내를 못 믿는 솔비 씨의 특이점 중 하나는 나를 못 믿는 거 같은데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 절대 "NO"가 없다는 거다. 항상 "해봐"라고 했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솔비 씨의 전폭적인 "해봐" 덕분에 내 인생이 빙빙 돌아가는 여정이 되었지만, 그래도 그 덕에 풍부한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아빠는 대기업에서 일하시며 늘 바쁘셨고, 기억 속 아빠는 무뚝뚝하고 엄격한 분이었다. 지금 돌아보면, 아빠는 고부간 갈등을 중재하고, 함께 사는 어린 친척들의 아버지 역할을 하며, 가장으로서의 무게에 지쳐 말수가 적으셨던 것 같다. 돌아보면, 늘 가장의 역할을 묵묵히 해내신 아빠 덕분에 책임감을 배웠고, 지금껏 걱정 없이 하고 싶은 것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언니와 나는 1살 차이인데, 어릴 때부터 언니는 외유내강 스타일이었다. 조부모님은 맞벌이하시는 부모님을 대신해 나와 언니를 돌봐주셨는데, 언니는 할머니 말씀을 잘 따르면서도, 할머니가 엄마를 구박할 때는 앙칼지게 엄마 편을 들곤 했다. 나이 어린 큰딸에게 보호받던 엄마는 큰 딸을 바라보는 눈에서는 꿀이, 철없던 나를 바라볼 때는 불이 나오는 것을 느꼈던 기억이 있다. 시집살이를 겪는 엄마를 지켜주던 언니는 일찍 어른이 되었고, 나는 그런 언니를 늘 따랐다. 언니는 내가 내리는 모든 결정을 지원하고 존중해 주는 든든한 조력자다. 

함께 살던 친척 언니, 오빠들은 공장에서 일하느라 바빴지만, 일이 끝나고 집에 오면 항상 놀아주며 어린 나를 많이 아껴주었다. 언니 오빠들은 넉넉하진 않았지만, 치열하게 살았고 돈을 모아서 내가 11살 되던 해에 이사를 나갔다. 어릴 적, 언니 오빠들과 쌓아놓은 좋은 기억들 덕분인지,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것에 거부감이 없이 사람을 좋아하는 거 같다.  

어릴 적 나는 끼도 많고, 정도 많고, 철은 없고, 남의 눈치는 어떻게 보는 건지 모르고, 그저 천진난만하고, 유쾌한 아이였다. 아침에 눈을 뜨면 마이클 잭슨 음악에 맞춰 방바닥에 스프레이를 뿌리며 몇 시간씩 춤을 추거나, 후레쉬맨 노래를 하루 종일 따라 부르거나, 인형놀이에 몰입해 연기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기 센 식구들 덕분에 이리저리 휘둘리며 사느라 자기주장을 해볼 기회는 없어서 인지 그리 똘똘하진 않았지만, 공부가 뒤처지거나 말이 느렸던 기억은 없다. 7살에 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