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데 어울림
라녹(Ranok)은 우크라이나어로 ‘아침’이라는 뜻이다. 라녹 카페의 브런치 ‘라녹’은 돼지고기와 양배추, 감자, 비트를 넣어 끓인 우크라이나 스튜 요리다. 오래도록 뭉근하게 끓여서 비트의 붉은빛이 마치 토마토소스 같다. 하지만 이 음식의 본래 이름은 ‘보르쉬’(Borscht)다.
호스트 말로는 이 가게를 운영하는 여주인의 독일인 남편이 매일 보르쉬를 끓인다고 한다. 고로 그의 우크라이나인 어머니에게서 전수받은 진짜 보르쉬를 맛볼 수 있는 것이다. 다르다면 제주산 흑돼지와 채소를 쓴다는 것. 그리고 이름까지 ‘라녹’으로 달라진, 같지만 다른 ‘보르쉬’의 탄생이다.
맛은 뭐랄까. 속을 풀고 덥혀준다고나 할까. 토마토가 없는데 먹는 내내 토마토가 생각나는 건강한 맛. 익힌 토마토를 좋아하는 나로선 손해 볼 게 없지만 토마토가 싫으면 비호감일 수도 있겠다. 그럼 토마토 이미지는 거둬버리자. 당신이 토마토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건강에 대한 호감이 있다면 첫술에 '바로 이 맛이야.'라는 상투적인 표현이 기분 좋게 나올 것이다. 눈웃음 가득한 여주인의 싹싹한 다정함이 라녹에 대한 호감을 더한다. 사진 속 라녹은 협재 가는 날, 브런치로 먹은 첫 번째 라녹이다. 오늘은 두 친구와 두 번째 라녹을 먹었다.
모르겐도 함께 시켰다. 모르겐(Morgen)은 독일어로 ‘아침’을 의미한다. 모르겐은 식빵 위에 베이컨, 그 위에 치즈가 서로 접하고는 있지만 각자의 영역을 지키고 있다. 경계가 뚜렷하다. 하지만 라녹은 모든 재료들이 끓어서 한데 섞여있다. 각자의 영역은 사라지고 하나의 새로운 맛을 낸다. 재료들 사이의 경계는 모르겐처럼 또렷하지 않고 허물어졌지만 고유의 형태는 유지하고 있다. 날 것일 때와는 다른 맛과 형태로 말이다.
나는 어쩐지 제주도가 라녹을 담은 예쁜 도자기그릇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아름다운 섬은, 섬이라는 지형적 특성으로 꽤 오래 고립되어 고유한 문화를 형성했을 것이다. 해상과 항공 교통이 발달하면서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 섬을 찾아오고 매료되었다. 물론 사람들이 매료되어 몰려드는 다른 수많은 도시들이 있다. 산업, 금융, 관공서, 패션, 대학, 문화재, 관광 등 도시마다의 구심점에 따라 사람들을 끄는 요인들은 많이 있다. 하지만 제주는 '일' 그 자체만이 아닌 '쉼'을 찾아오는 사람들의 용광로라는 생각이 든다.
'쉼'을 즐기는 사람들은 자연에서 많은 영감을 받는다. 그들은 제주토착민이 이룩한 고유성을 받아들여 활발하게 교류하며 재해석하고 재창조해낸다. 그렇게 제주도라는 큰 그릇 안에 새로운 문화가 라녹처럼 한데 어울려 깊은 맛을 녹여낸다.
한 테이블에 앉은 우리 셋, 각자 다른 환경에서 자라고 살고 있는 우리가 쉼을 찾아 제주에 왔다. 우리의 이야기들이 한데 어울려 제주에서 또 하나의 이야기를 녹여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