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과 쉼
민희가 용인에서 날 만나러 제주로 왔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30년 지기 친구다.
"근데 은영아, 너 가고 나면 1박 2일 동안 나 뭐 하고 놀지?"
"내가 갔던 데 알려줄게. 놀 거 많아."
내가 떠나면 민희도 남은 1박 2일은 나홀로 여행을 계획했으나 이 계획을 들은 수영친구 인영이 자기도 같이 가도 되는지 슬쩍 물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두 친구 사이에 불청객이 되지나 않을까 싶은 마음일 터이다.
"은영아, 인영씨 데리고 가도 돼?"
"당연하지. 네 친구인데 뭐 어때. 어차피 너 혼자 남으면 뭐 하나 살짝 걱정했잖아. 잘 됐네."
그렇게 함께 온 인영. 초면인데 이름이 비슷해서 그런가 낯설지 않다. 11시가 못 되어 애월에 도착한 민희와 인영에게 제주평강을 구경시켜주고 잠시 짐을 보관해두었다. 뭐 따지고 보면 딱히 보관했다고 할 수도 없다. 제주평강은 항상 열려있으니 말이다.
다음은 출출한 배을 달래줄 브런치 카페로 향했다. 마녀수프의 열렬한 추종자인 민희에게 라녹을 먹여주고 싶었다. 민희는 예상대로 라녹을 좋아했고 인영의 입맛에도 맞아 다행이었다. 우리는 라녹을 먹고 한담해변이 보이는 숙소에 민희와 인영씨 짐을 풀고 한담해안 산책로를 걸었다. 아직 비는 오지 않는다.
이 골목 저 골목을 기웃거리다가 버스를 타고 협재로 왔다. 파도치는 협재 바다 앞에서 갈매기처럼 두 팔 벌리고 뛰어도 보고 바람을 마음껏 맞는다. 며칠 전 협재와는 달리 풍랑이 세다.
내일은 집으로 돌아가는 날이므로 오늘이 사실상 여행의 마지막 날이다. 날씨가 마지막까지 유종의 미를 거두려는 것인지 그동안 유예되었던 태풍은 오지 않고 보슬보슬 비가 내리는 것으로 퉁치려나 보다.
골목을 걷던 중 만난 일일초는 매일 새로운 꽃을 피워낸다고 하여 '매일초'라고도 불린다. 마다가스카르, 자바섬, 브라질 등이 원산지라고 하는데 어떤 경로로 제주까지 오게 되었을까? 지혈, 항암, 혈압강하 등 약효가 많다 보니 사람들에 의해 멀리멀리 퍼지지 않았을까 추리해 본다. 일일초를 검색해 보니 꽃말은 3가지가 있다.
즐거운 추억
우정
당신을 사랑합니다
오늘 1일과 참 어울리는 꽃말이다. 사랑 고백은 없었지만, 민희와 인영씨를 만나 '즐거운 추억'을 하나 만들고 우리의 '우정'은 더 깊어졌으니까. 사실 제주에서의 매일매일이 즐거운 추억과 우정이 만들어지는 날이었다. 매일초! 너를 지극히 개인적인 나만의 '제주 꽃'으로 임명하노라!
골목 탐방 중에 발견한 집이다. 살짝 밀린 왼쪽 나무문을 슬며시 밀면 열릴 것 같다. 그게 아니면 낮은 대문을 슬그머니 넘고 싶은 충동이 인다. 촘촘히 세로로 연결된 나무와 나무사이, 살짝 벌어진 틈 사이로 초록이 길게 빛나며 유혹한다. 중심부에 보이는 가로문 양쪽으로 마치 문지기처럼 서 있는 두 나무 사이를 지나 가로줄 나무문으로 들어서면 작은 숲이 펼쳐질 것만 같다. 이 집을 지나면서 민희가 노래를 하나 추천한다.
숨을 쉰다
쉬어본다
멀리멀리
사라진다
어제와는 또 다른
오늘의 내가 있다
숨을 쉰다
쉬어본다
하루하루
살아진다
내 자신을 밝히어서
스스로 빛이 되어본다
박지윤의 <숨을 쉰다> 중에서
제주 여행을 다녀온 후, 글쓰기 모임의 벗, 빠돌님이 소개해준 노래가 있다.
숨 소리를 내어보면
나는 사이가 생각나
말과 말 길과 담 나무 나무
서서히 스밀 수 있게
천천히 흐를 수 있게
너와 나 사이 부는 바람 숨 숨
시와의 <숨> 중에서
'숨'에 대한 두 노래가 마음에 울린다. '박지윤의 숨'은 숨 고르기를 하며 하루하루 살아내는 한 사람의 비장함이 느껴지는 반면, '시와의 숨'은 '너와 나 사이의 바람'으로 마주 앉은 두 사람의 가벼운 날숨을 느낄 수 있다. 길과 담 사이에 부는 바람도 숨이고 나무와 나무 사이 부는 바람도 숨이다. 숨은 바로 너와 나가 무엇이든 그 사이에 부는 바람인 것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이야기주머니를 하나씩 가지고 있다. 어떤 날은 그 이야기를 풀기도 하고 어떤 날은 꽁꽁 싸매기도 한다. 어떤 날은 또 하나의 이야기를 담기도 한다.
오늘 제주에서 우리들은 각자의 이야기주머니를 풀어 숨을 쉬게 한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야기를 담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