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벨로부터
비양도에서 4시 15분 배를 타기 위해 대합실로 향한다. 가늘게 내리던 빗방울이 조금씩 굵어져 작은 대합실에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배를 타고 10여분 만에 한림항에 도착한다. 버스를 타기 위해 큰길 따라 주 도로로 나온다. 오래지 않아 버스가 도착한다. 그래도 비양도를 다 돌아볼 즈음 비가 내려 다행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낮에 아벨과 주고받은 문자를 다시 한번 확인한다.
아벨~ 오늘 저녁은 같이 못할 거 같아요. 5시쯤 애월 들어가면 소랑언니 만나려고요. 비양도 참 좋네요!
네네. 그래도 국은 끓여놓았어요. 집밥 땡기면 드세요. 한적하게 좋은 시간 보내고 오세요.
고맙습니다.^^
밥은 뭐랄까? 절대적이다. 나는 밥은 절대 거절하지 않는다. 내 사전에서 밥의 정의는 "누군가 나에게 베풀 수 있는 가장 큰 호의, 특히 손수 해주는 밥"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다른 사람을 대하지 않던가. 그래서 나 역시 남에게 베푸는 가장 큰 호의는 밥을 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입맛을 잘 모르는 남에게 선뜻 밥을 해주기가 어렵다. 그래서 밥을 사주는 것으로 대신하는데... 만난 지 1주일도 채 되지 않은 아벨이 밥을 해주다니... 감격스럽다. 오늘 소랑언니 몸이 안 좋아져 못 만나게 될 거라는 걸 예상했을까? 내 식성이 무척 소박하다는 것을 간파한 건가? 덕분에 홀로 추적추적 비를 맞으며 밥집을 찾아다닐 필요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센스있게 초록나물까지 사놓았다. 찌개를 먼저 한 술 뜬다. 푹 끓인 김치찌개 속 뚝뚝 큼직하게 썰어놓은 대파가 부드럽게 물러져 달다. 입맛이 확 돈다. 내가 끓인 것보다 훨씬 맛있다. 사실 밥 하는 여자들만의 공통된 믿음이 있다. 그건 바로 남이 해준 밥이 제일 맛있다는 것! 아벨에게 문자를 보낸다.
와우~ 김치찌개 식당을 하셔도 되겠어요! 맵지 않고 순한 김치찌개 넘 맛있어요.^^
ㅎㅎ 입맛에 맞으시다니 다행이에요. 맛있게 드셔주세요.
오늘도 환대받는다. 호스트인 아벨은 매일매일 게스트인 나를 환대한다. 나의 귀가를 기다려주는 환대가 아니라 언제라도 내가 돌아올 때 내 집처럼 편하게 지낼 수 있는 따스한 환대를 제공한다. 오늘은 제주평강에서의 6번째 귀가를 밥과 찌개로 환대받으며 따스한 포만감을 느낀다.
밥을 먹고 내 방으로 돌아와 보니 환대가 다 끝난 것이 아니었다. 내 책상 위에는 처음 보는 책이 한 권 놓여있다. 오사다 히로시의 <심호흡의 필요>이다. 책갈피에 아벨이 써놓은 '산책'에 대한 글귀와 엽서에 쓴 짧은 메시지가 마음에 와닿는다. 책의 목차를 살펴보니 <산책>이라는 제목의 산문이 있다.
그냥 걷는다. 손에 아무것도 들지 않는다. 서두르지 않는다. 마음에 드는 길모퉁이가 나오면, 쓱 방향을 바꾼다. 모퉁이를 돌면, 길 앞의 풍경이 확 달라진다.
(중략)
마을에 숨겨진, 보이지 않는 사다리타기 종이를 스르륵 펼치듯, 길모퉁이를 몇 개나 돌며, 어디에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걷는 것을 즐기기 위해 마을을 걷는다.
(중략)
어디로 뭔가를 하러 갈 수는 있어도, 걷는 것 자체를 즐기기 위해 걷는 것, 그게 쉽게 잘 안 된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건, 가장 간단한 것.
오사다 히로시의 <산책> 중에서
아! 어쩜 이리도 내 마음 같은가.
나는 이 밤 이 글와 함께 심호흡을 하며 오늘 하루를 다시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