컵라면 같이 드실래요?
마틸다에서 나와 버스를 탄다. 나는 민희와 인영씨와 작별인사를 하고 애월에서 먼저 내린다.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축축해진 캔버스화를 신고서 제주평강에 들어서자, 아리와 두리가 나를 맞이한다.
두리는 언제나처럼 내 다리를 베개 삼는다. 덕분에 빗물이 스며든 약간의 한기는 온기로 바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벨에게 문자가 온다. 비행기 연착으로 늦어진 손님맞이를 나에게 부탁한다는 전갈이다.
어떤 사람일까? 궁금해진다. 어제와 그제도 태풍예보로 취소되었던 옆방 객실을 당일 예약한 1박 게스트들이 있었다. 어제는 20대 여자. 그제는 20대 남자. 둘 다 아주 조용히 나그네처럼 하룻밤 자고 갔다. 얼굴만 한번 스쳤을 뿐이다. 아니, 생각해보니 남자는 흔적을 남겼다. 사용한 수건을 거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두고 떠났으니 말이다.
그건 그렇고, 일단 오늘은 호스트에게 부탁 혹은 임무 지명을 받은 만큼 일종의 사명감을 느끼면서, 게스트를 기다릴 겸 거실 TV를 켠다. 넷플로 <태어난 김에 음악일주>를 보고 있는데 밤 9시쯤? 아니 10시쯤이었나? 큰 여행가방을 들고 여자 게스트가 씩씩하게 들어온다. 미소가 소탈하다.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비 오는데 이동이 좀 번잡했죠?"
"택시 타고 왔는데 숙소 주변에 가로등이 없어 입구를 잘 못 찾겠더라고요."
게스트는 고양이를 보더니 무척 반가워한다.
"아리와 두리예요. 얘들은 낯가림이 없어요. 사람을 참 좋아하죠."
벌써 처음 보는 게스트의 다리에 머리를 문지르며 애정공세를 한다.
"시간이 늦어서 호스트님이 제게 대신 집을 소개해달라고 부탁했어요. 왼쪽은 제 방이고 오른쪽 방을 쓰시면 돼요. 이 집 전기콘센트는 다 이렇게 머리 높이에 있어요."
나는 TV와 스피커 사용법이며 주방 집기들의 위치와 사용방법, 그리고 화장실 온풍기 사용법까지 속성으로 설명해 줬다. 일주일째 되니 이 집은 손바닥처럼 훤하다.
"빨래통에 수건이랑 같이 세탁할 옷을 넣어두면 호스트가 세탁해서 건조기로 말려줘요."
"네. 고마워요."
서울에서 온 승민씨는 싱글 생글 웃는다.
"참, 호스트가 라면을 항상 비치해 두는데 끓여드셔도 돼요. 오늘은 컵라면도 있네요."
"그렇잖아도 저녁을 못 먹어서 배 고팠거든요. 같이 드실래요?"
"그럴까요?"
나는 일상에서는 절대 야식을 하지 않는다. 위를 비운 상태에서 자는 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상 탈피를 갈망하는 여행에서만큼은 간혹 야식을 허용한다. 처음 만난 우리는 얼굴 마주 보고 컵라면을 먹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다.
혼자서 종종 여행을 다니는 승민씨가 이 집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냥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반려동물이 있는 집을 선호하는 그녀는 세상 다정한 두리와 아리와 함께라면 집에서만 지내도 심심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그녀는 걷기를 좋아해서 제주에 오면 늘 올레길을 걷는다. 어디가 좋았냐는 질문에 지난해 제주 산방산을 조망할 수 있는 올레길 10코스가 가장 좋았다고 추천한다. 나는 산방산에 한 번도 오르지 않았지만 다음 여행에는 산방산도 오르고 10코스도 걸어봐야겠다고 속으로 다짐한다.
승민씨는 와인을 한 병 꺼낸다. 누구라도 말동무가 생기면 같이 마시려고 가지고 온 와인이다. 나는 알코올을 마시지 않기 때문에 정중히 사양했고 승민씨는 내 비알콜주의를 존중하며 혼자 마신다. 내가 지난해 시립도서관에서 글쓰기반 문우들과 함께 펴낸 <그해 첫 여름>이라는 문집이 테이블에 놓여있다. 책 소개를 하자, 승민씨는 그 자리에서 내가 쓴 일곱 편의 산문과 시를 모두 읽어낸다.
"제가 활자중독이라서요. 하하. 저는 <비에 대한 고백>이 가장 좋은데요."
문집을 소개하거나 선물로 주면 대부분 나중에 집에 가서 혼자 조용히 읽어보겠다고 하는데 당사자인 나를 앞에 두고 휘리릭 읽는 경우는 처음 봤다. 나는 그녀의 즉각적 읽기 행동에 신선한 충격과 함께 감동이 일었다. 오늘이 지나면 나는 떠날 테고, 우리에게 오늘 밤은 다시없을 것이다. 그러니 대화상대를 면전에 두고서 글을 읽는다는 것은, 상대를 무시하는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존중의 의미로 해석된다. 그녀의 솔직하고 빠른 감상이 고맙다.
돌담 틈에서 자라는 다육식물, 용월과 돌담 아래에서 자라는 일일초. 이 둘은 전반적인 형태를 비롯하여 생육환경이 참 다르다. 그런데 돌담을 배경으로 어쩜 저리도 잘 어울리는가? 이들은 각자의 영역 안에서 번성하고 충만하다. 고유성을 잃지 않고 빛난다. 다를 뿐 무엇이 더 높고 낮음은 없다. 그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조화롭다.
나와 승민씨도 참 다르지만 이 공간을 배경으로 어울린다 . 제주여행에서 내가 만난 모든 사람들이 그렇다. 그리고 이 글을 보고 있는 당신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다를 뿐 누가 더 높고 낮음은 없다. 우리는 그저 각자의 모양과 색깔대로 마음을 살짝 열고 다가가면 되는 것이다. 서로의 영역을 함부로 넘나들지 않고 소중하게 대하는 마음이 있다면 다름은 세상을 더 충만하게 만드는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