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관
막내딸이 4살이었을 때다. 어느 나른한 오후 아파트단지 놀이터에서 어린이집 열매반 친구와 놀고 있었다. 그 아이 엄마가 나를 보며 말했다. “ㅇㅇ엄마를 보면 초식동물이 떠올라요. 사슴이나 기린 같은 초식동물.” 대뜸 초식동물이라니 무슨 말이냐고 묻자, 자기는 사람들을 보면 동물의 이미지가 연상되는데 나는 초식동물과라는 것이다. 뜬금없기는 해도 뭐 싫지는 않았다. 곧은 자세로 숲을 거닐며 맑은 눈망울을 총총 빛내는 사슴을 떠올리면 뭐랄까 우아해 보인달까. 마르고 긴 외형 때문에 빚어진 이미지겠거니 생각했다.
그로부터 6년이 흘러 막내가 10살이 되던 해, 설거지를 하고 싱크대 물때를 닦다가 남편은 왜 설거지를 하면서 물때를 같이 닦지 않을까. 몇 번 얘기했는데, 얘기할 때만 하고... 그뿐인가... 카레에 넣을 양파를 매번 어떻게 썰지 물어보거나 찾는 물건이 바로 눈앞에 있어도 발견하지 못하는 일이 많은데... 그래, 그런 사람이 물때가 끼어도 당연히 못 보는 거겠지. 애들 넷이 하나같이 그건 아빠를 닮았지. 그럼 나는 왜 주변을 빨리 파악할까? 눈치는 타고나는 건가? 그때, 번뜩 잊었던 말이 떠올랐다. 내가 초식동물 같다던 말. 그리고 함께 떠오른 유년.
어린 시절, 바람 잘 날이 없던 나의 집. 알코올중독인 아버지와 싸워야 하는 어머니. 하루가 멀다하고 전쟁터였다. 집어던지는 집기류와 거친 말들. 아버지가 집에 돌아오면 나는 포식자를 피해 달아나는 초식동물이 되었다. 아버지가 집에 없어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물을 마실 때조차도 중간에 고개를 들고 두리번거리는 초식동물처럼 모든 감각을 동원해 주변을 살펴야 했다. 포식자는 예고 없이 나타나니까. 항상 모든 상황을 대비할 수 있도록 눈과 귀를 열어두고 민첩하게 반응하는 것, 그것만이 덜 고통받는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상황판단과 대처가 빨라졌다. 그 결과 초식동물의 자기방어, 곧 직관을 얻은 것이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 직관이 지금의 나의 삶에서 여러모로 유익하게 그리고 필수적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