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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터널 지나기

두려움을 두려움으로

by 조은영 GoodSpirit

무더운 여름날이면 간담에 서늘함을 선사할 공포물이 쏟아져 나온다. 그러나 나는 곁눈질로라도 공포물을 보지 않는다. 유혈이 낭자한 범죄물이나 전쟁영화도 싫어한다. 굳이 인간의 존엄이 무참히 짓밟히는 장면을 목도하고 싶지 않다. 그런 장면들은 지박령처럼 뇌리에 박혀서 원치 않는 순간에 출몰하기 때문이다. 나는 잔혹과 폭력적 장면에 도무지 무뎌지지 않고 무뎌질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런 내가 어렸을 때는 공포물을 보았다. 이불을 뒤집어쓴 채 무서워 벌벌 떨면서도 납량특집 <전설의 고향>을 끝까지 봤다. 그것을 본 밤이면 어김없이 네 자매들은 한 방에 모여 가위바위보로 잠 잘 자리를 정했다. 가운데 끼어 잘 수 있다면 좋겠지만 확률은 50프로, 그 짧은 순간의 가위바위보로 운명이 갈리고 문 쪽 가장자리가 내 자리가 되면 나는 불을 다 켜놓고도 영원 같은 불면의 밤을 지새웠다. 까딱 잠들었다가는 귀신이 나타날까 봐 두려웠다. 유년의 나는 진짜로 그렇게 믿었다. 지지리 겁도 많은 내가 왜 굳이 공포영화를 봤을까...


이 문제에 대해 곰곰 생각해 보다가 그건 어쩌면 현실의 공포를 가상의 공포로 소멸시키려는 자기 보호본능이 작용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의미에서 어린 나에게 공포물이 제공하는 비현실적 두려움이 너무 강력해서 현실적 두려움은 대수롭지 않은 것이 되었다. 비현실적 두려움을 주는 악령이나 귀신, 괴물 들은 초자연적이라 도무지 내 힘으론 벗어날 수가 없을 만큼 강력하니 말이다. 그렇게 더 강력한 공포로 현실의 공포를 무력화시켰다. 하지만 아이러니한 것은 비현실적 공포를 일으키는 주체는 현실계에서 실존하지 않으면서도 실존하는 공포를 지속적으로 안겨준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것은 결국 자기 보호이자 동시에 자기 파괴인 셈이다.


오래전 우연히 보았던 다큐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다큐멘터리 화면에서 일본의 혐한단체인 재특회가 재일조선인과 한국인을 향해 입에 담기도 역겨운 무분별한 혐오발언들을 쏟아낼 때 '시바키타이'는 그들을 향해 문자 그대로 자신들의 몸을 던졌다. 반인종차별주의 행동단체 '시바키타이'는 말 그대로 인종차별주의자인 재특회의 부조리한 시위를 퇴치하기 위해 결집한 행동주의 단체이다. 그들에게 인종차별에 맞서 싸우는 전략 중 하나가 혐한 시위대를 향해 몸을 던져 물리적 충돌을 시도함으로써, 혐한 시위대의 혐오를 자신들에게 향하게 하는 방식이다. 즉 몸을 던짐으로써 시위의 진행을 방해하는 순간 한국인을 향했던 재특회의 혐오는 눈앞에 직면한 시바키타이로 전환된다. 재특회와 시바키타이가 서로에게 주먹다짐과 욕설을 퍼붓는 동안 혐한 시위의 명분은 사라지고 몸싸움만 남는다. 애당초 명분이란 게 없는 시위라서 쉽게 단순 폭력현장으로 돌변하면 경찰이 개입하여 현장을 정리하면 시위는 끝이 난다.


내게 공포영화는 일종의 시바키타이였다. 마치 스위치를 누르면 어둠에서 빛으로, 빛에서 어둠으로 전환되는 것과 유사하다. 비현실 공포물 스위치가 켜지면 현실의 공포는 끝이 난다. 눈앞에 있지 않은 대상에 대한 혐오를 당장 눈앞의 대상에 대한 혐오로 바꿔버린 시바키타이처럼 공포물은 유년의 아버지가 만들어내는 현실적 공포 스위치를 잠시 끌 수 있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제 현실에서는 무엇도 날 두렵게 만들 수 없으므로 두려움을 잊게 만들 스위치는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되었다. 나의 어두운 터널 안 두려움을 이미 지나왔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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