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형놀이를 하던 날들
유년시절 내가 가장 좋아하던 놀이를 꼽으라면 단연코 인형놀이였다. 8등신 금발머리 마루인형. 요즘은 구체관절인형으로 부르지만 그 시절에는 마루인형이었다. 마루인형은 무슨 뜻이었을까? 이제와 찾아보니 일본어 '마루이'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둥근 공 형태의 구체관절이 있어 팔다리를 굽힐 수 있었기에 '둥글다'를 뜻하는 '마루이'라는 단어를 붙여 '마루이 인형'으로 부르던 것을 축약해서 '마루인형'이라 불렀다고 한다.
마루인형을 사면 보통 여벌옷이 한두 벌 들어 있었다. 하지만 인형놀이를 하다 보면 옷에 따라 역할이나 분위기가 바뀌기 때문에 의상 한두 벌로는 배경과 스토리 설정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놀이의 깊이를 더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의상과 소품이 필수적이다. 마치 무대에 오르는 배우들과 마찬가지다. 그리하여 나는 문구점에서 의상과 구두, 소품 같은 것을 신중하게 고르고 골랐다. 그러나 문구점 의상은 바느질 상태가 조악했으며 옷을 여미기 위해 단추나 지퍼보다는 찍찍이를 주로 사용했고 그 찍찍이는 양쪽이 정확하게 잘 맞아떨어지지 않아 살짝 비뚤어졌거나 길이가 다르기도 했다. 그리고 무슨 행사의상처럼 번들거리거나 반짝이는 소재의 의상이 많아 더욱 조잡스러웠다. 그래서 기쁨은 짧게 아쉬움은 길게 남는 비효율적 구매 패턴이 반복되다 보니 다른 방법을 찾기로 했다.
바로 맞춤의상 제작. 나에게는 돈을 들이지 않고도 세상에 단 하나뿐인 멋진 의상을 기꺼이 제작해 줄 엄마가 있었다. 왕년에 디자이너가 꿈이었던 엄마는 가부장적인 외삼촌의 월권적인 탄압으로 끝내 세상적으로 그 꿈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어쩌면 그 덕분에 나의 마루인형들은 철마다 독보적인 디자인의 의상을 얻어 입었다. 사실 엄마는 네 딸들에게도 유니크한 의상을 만들어주기도 했는데 있는 듯 없는 듯 사람들 사이에 섞이고 싶었던 나는 도무지 그 도드라짐을 감당할 수 없었으므로 엄마표 옷을 홀대하기 일쑤였다.
1940년대에 태어났던 엄마는 언제나 실크 블라우스에 밝은 톤의 투피스 정장을 즐겨 입었고 키가 160이 넘지만 꼭 하이힐을 신었다. 엄마는 어딜 가나 튀었으며 유행을 따르기보다는 자신만의 확고한 스타일이 있는 패셔니스타에 가까웠다. 80이 넘은 지금도 외출할 때는 곱게 원피스를 차려입고 굽 낮은 구두를 맞춰 신는다. 이처럼 패션에 진심인 엄마이다 보니 마루인형의 옷에도 진심이었다. 엄마는 마치 유명모델에게 맞춤 의상을 만들어주는 디자이너 같았다. 의상 콘셉트에 맞게 옷 모양을 그리고 적합한 옷감을 고른 다음, 마루인형의 사이즈에 맞게 재단하여 꼼꼼하게 박음질을 하였다. 그렇게 딸들에게 푸대접받았던 레이스와 리본 등으로 한껏 꾸민 이브닝드레스가 탄생했다. 실을 끼운 재봉틀 바늘이 빠른 속도로 옷감을 드드드드 위아래로 박음질할 때 생기는 균일한 바느질땀을 보면 때로 조각난 나의 마음들이 촘촘히 이어 붙는 것 같았다.
마루인형은 현실의 나를 대신하는 아바타 같은 존재였다. 온라인이라는 가상의 공간에서 나를 대신하는 캐릭터인 아바타. 현실에서 스스로 존재할 수 없지만 비현실에서 살아 움직이는 아바타. 마루인형은 현실에서 자신의 삶을 의지적으로 살 수 없지만 비현실이라는 가상의 놀이 공간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나'라는 존재를 대신해서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이든 말할 수 있다. 나의 수많은 그녀들은 어린 내가 떠날 수 없는 집과 학교를 떠나 마음껏 여러 나라를 여행하고 파티를 열거나 홀로 집에서 티타임을 즐기기도 한다. 그녀들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하며 하고 싶은 일들을 한다. 그렇다고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다. 그리고 때로는 내가 듣고 싶은 위로의 말을 나에게 해준다. 그녀들은 나와 원팀이니까.
인형의 집에서 의자에 앉아 쉬고 있는 마루인형을 보면서 나는 그녀가 진짜 살아있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낮에는 나의 아바타로 살아가지만 모두가 잠든 밤에는 자기 삶을 살아가는 한 존재. 그렇다면 낮에는 자야 할 텐데 내가 너무 고단하게 만든 것은 아닐까. 내가 입혀주는 옷들이 맘에는 들까. 내가 하는 말들이 너무 억지스럽지는 않을까. 어쩌면 그런 것들은 마루인형이라는 태생적 한계에서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부분일 수도 있겠다.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누구나 자신의 태생적 환경에서 스스로 감당해야만 하는 것이 있으니까. 우리는 모두 무엇의 일부가 되어 살면서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것들을 감당하며 자신을 찾고 일으켜 세우는 것을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