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나의 세계
늙은 어머니와 나이 든 아들이 함께 하는 작은 구멍가게가 있었다. 잿빛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가게는 늙은 어머니의 굽은 등처럼 위태롭고 허름해서 언제라도 무너져 내릴 것처럼 보였다. 묵은 먼지가 뿌옇게 앉은 가게 전면의 미닫이 유리문은 항상 활짝 열려 있었다.
나는 이따금 양은주전자를 들고 이 가게를 찾았다. 막걸리 심부름값으로 받은 500원을 손에 쥐고서 문턱을 넘어 가게로 들어섰다. 양은주전자를 주인할머니에게 내밀고 오늘은 무슨 새로운 것이 있나 가게 안을 흝어보았다. 사실 이 작고 낡은 가게에 새로울 것은 결코 없을 것임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건 그저 어떤 경우에라도 희망을 구하는 어린아이의 습성 같은 것이었다. 가끔씩 가게 오른편 구석에는 막걸리를 마시는 취객들이 불콰하게 취해 떠들고 있었다. 벽면에는 긴 선반들이 경주용 트랙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줄지어 있었다. 선반마다 라면, 통조림, 건어물, 과자, 빵 등이 나름의 질서를 지키며 자리 잡고 있고 그 사이사이 먼지가 존재감을 드러냈다. 먼지는 떨어질 수 없는 고정물처럼 이 가게 어디에나 붙박여 있었다. 선반 위 물건들은 종종 유통기한이 지나 있었다. 검은 천을 씌운 콩나물시루나 두부모판이 같은 운명공동체인 듯 나란히 가겟방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어린 나에게 이 가게의 풍경은 청승맞거나 지저분하지 않았다. 그저 우리 모두 사는 모습이 다르듯 그 가게의 풍경일 뿐이었다. 한 손에는 막걸리를 채운 양은주전자를 들고 한 손에는 막대사탕이나 아이스크림을 빨면서 집으로 돌아오는 것도 그 시절 나의 풍경 중 하나였다.
이 낡은 구멍가게 반대편 길, 오른편으로 쭉 내려가면 보이는 새로 생긴 슈퍼도 있다. 삼거리슈퍼였나. 아니면 아무개의 이름이었나. 옛 동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하디 흔한 이름인지라 기억에 남지 않는다. 다만 가게의 풍경만은 여전히 선명하다. 가게 내외벽은 모두 하얀색 페인트가 칠해지고 한낮에도 여러 개의 기다란 형광등 불빛이 환히 과자봉지를 비추며 빛나는 풍경이었다. 구멍가게의 나이 든 아들보다 더 젊은 부부가 운영하는 슈퍼였다. 주인아줌마가 자주 먼지떨이개를 써서 먼지는 어디에도 내려앉을 틈이 없었다. 슈퍼 가운데에 길게 양면으로 펼쳐진 과자 진열대를 나는 한참 둘러보았다. 알록달록 번들거리는 과자봉지들은 나를 현혹시켰다.
그러나 내 단골집은 따로 있었다. 학교 앞 문구점. 문구점이 없었더라면 나는 학교를 다 마치지 못했을 수도 있겠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이 너무 많은 곳을 좋아하지 않는다. 한 교실에 50명이 넘는 어린이들이 모여있으며 학년당 5~6반, 학생수가 많을 때는 오전오후반이 운영될 때도 있었다. 좁은 교실 안에서 순수하고 부주의하고 야만적인 어린이들은 아무 말이나 쉽게 하고 아무렇게나 움직이고 배려를 몰랐다. 피로감으로 지친 선생님들은 우리를 방치했다. 그래서 나는 학교라는 공간이 못 견디게 싫었다. 바글거리는 아이들로 교실, 복도, 운동장 어디 하나 틈이 없었다. 하교종이 울리는 탈출의 시간이 나에게는 파블로프의 종소리처럼 반가웠다.
나는 문구점으로 달려갔다. 설탕을 잔뜩 묻힌 핫도그, 빨대 속 알록달록 설탕크림이 든 아폴로, 돈부콩을 꼭 빼닮은 돈부과자, 옥수수 브이콘, 오색찬란한 눈깔사탕이 있는 곳으로. 하지만 그 무엇보다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거대한 물고기 모양의 왕엿이었다. 모서리에 초록 띠를 두른 네모난 어항 같은 곳에 들어있는 거대한 금빛 물고기가 나는 몹시도 갖고 싶었다. 돈을 주고 살 수 없고 뽑기의 운에 맡겨야 하는 것이 뭔가 더 운명적이고 대단해 보였다. 반드시 그 왕엿을 뽑아야 했다. 꽤 긴 기간 동안 용돈을 바친 덕분에, 어느 날 드디어 거대한 물고기를 뽑았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었다. 집까지 꽤 걸어가야 했던 어린아이가 제 팔만큼 긴 물고기를 들고 가는 게 만만치 않았다. 얇은 설탕엿이라 끝내는 작은 충격에 쉽게 부서지고 말았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왔다. 어쩌면 이상은 그것이 현실이 아닌 이상일 때만 이상적일 수 있을 것이다. 현실이 되어버린 부서진 물고기를 먹으며 집으로 돌아가면서 이만하면 나쁘지 않다고 믿고 싶었다. 산산조각이 난 것도 아니고 바닥에 떨어뜨리지도 않았으며 여전히 단맛은 느껴진다며 위로했다.
모든 사물을 입안에 넣고 탐색함으로써 심리적 안정을 얻는 구강기의 연장선인 것인지... 어린 나에게는 사탕, 과자, 초콜릿, 아이스크림 같은 온갖 단 것들을 스스럼없이 입안에 넣고 탐색하다가 목구멍으로 넘길 때 찾아오는 안도감이 있었다. 어쩌면 그것들이 조금이나마 나의 세계를 채우고 지탱할 힘을 주었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