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조은영 GoodSpirit
Dec 01. 2024
당신은 우리의 냉장고를 닮았습니다. 우리의 두 아들과 나이가 같은 17살 냉장고 말입니다.
우리는 17년을 함께 살았습니다, 당신과 나, 그리고 우리의 냉장고 말입니다, 난데없이 왜 자꾸 냉장고와 엮으려 하느냐고요? 이 이야기는 도서관 교양 강좌 <하루 한뼘 글쓰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글쓰기 수업 시간에 ‘나무’, ‘문구’, ‘가전제품’ 3가지 카테고리를 정하고 각 카테고리에 맞는 단어들을 무작위로 써 내려갔습니다. 나는 총 40여 개의 단어들을 썼고 그중에서 한 가지를 골라야 했죠. ‘나에게 당장 없으면 안 될 것은 뭘까?’ 그러자, 단, 하나의 단어가 눈에 꽂혔습니다.
‘냉장고’, 이렇게 ‘가전제품’ 카테고리에서 내 글감의 주인공이 탄생했습니다. 주인공의 특징을 나의 의식의 흐름에 따라 정리해 보자면,
첫째, 차갑습니다. 하지만 그 차가움을 유지하기 위해 부단하게 모터를 돌려야 하므로 냉기를 만드는 곳은 뜨겁습니다.
둘째, 존재감이 큽니다. 주방의 한쪽 벽면을 차지할 정도로 물리적 공간을 많이 차지할 뿐 아니라 그만큼 역할 면에서도 비중이 큽니다. 24시간 한 순간도 쉬는 시간이 없어요. 가끔 정전이 되는 짧은 시간을 빼고는요. 우리 집에서 이렇게 밤낮없이 일을 하는 가전제품은 냉장고뿐입니다. 여름이면 특히, 냉장고 문을 바삐 여닫는 아이들을 볼 때 그 존재감을 실감하죠.
셋째, 정직합니다. 냉장고는 거짓이 없어요, 일단 자신의 품 안으로 음식이 들어오면 차갑게 만들어 상하지 않게 보존시키죠. 하지만 영원토록 부패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대체로 1주는 끄떡없지만 음식물이 들어오는 시점, 상태, 그리고 보존제의 유무에 따라 음식물의 부패가 시작되는 시기가 달라지죠. 냉장고는 결코 마음에 드는 음식물에게 더 잘 대해주려고 보존기간을 늘려주거나 마음에 안 든다고 빨리 상하게 하는 식의 감정적인 대응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다 쓰고 보니, 이건 냉장고가 아닌 당신의 이야기이더군요.
맞아요, 당신은 항상 냉정과 침착을 유지하는 차가운 사람처럼 보여요. 하지만 속이 타들어 가도록 시름하는 당신을 본 적이 있습니다. 누구도 뜨거움에 데이지 않고 뜨거움의 시간은 자신만이 감당하는 거예요.
그럼요, 우리 집에서 당신의 존재감은 독보적입니다. 이른 새벽 일어나 지난밤 아이들이 사용한 그릇들을 씻어두고 세탁기를 돌리고 출근하죠, 일이 끝나면 돌아와 식사 준비를 함께하고 그릇을 씻고 산책하고 책을 읽고 모든 루틴을 끝내고 잠자리에 들어요. 당신은 빈둥거릴 때가 없어요. 가끔 번아웃이 찾아오기 전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죠.
그래요, 당신은 정직해요. 어쩌면 그건 당신에게 다양한 감정의 스펙트럼이 없어서일지도 모르겠군요. 당신은 정직하게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어요. 전혀 꾸미지 않아요. 당신의 품 안에 들어온 이들에게 거짓이 없지요. 당신은 열린 책처럼 있는 그대로 보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마음에 없는 말은 하지 못하고 공감하는 척하지도 않아요. 당신도 잘 알고 있듯이, 때로 그 때문에 나는 슬퍼져요. 당신은 슬퍼하는 나에게 뒤늦게 미안해합니다. 당신이 본능적인 공감 능력을 타고난 사람이라면 좋겠지만 나에게 한 템포 늦게 미안해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이제 괜찮습니다. 앞으로 더 괜찮아질 거예요. 우린 17년 된 친구잖아요. 나는 당신을 품을 겁니다. 당신이 나를 품은 것처럼요.
이 이야기는 냉장고 이야기이면서 바로 당신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품 이야기지요.
나는 냉장고의 부재를 생각할 수 없듯이 당신의 부재를 생각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