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밤, 외진 도로를 질주하는 스포츠카의 엔진 소리가 공기를 가르며 울려 퍼졌다. 운전대 앞에 앉아 있는 에이지는 이번에 새로 발매한 곡에 맞춰 혼자서 흥겹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이따금씩 술기운이 머릿속을 감돌며 현실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그런 느낌들이 드라이빙을 더욱 다이내믹하게 느껴지게 만들었다.
인적이라곤 끊긴 국도, 적당히 어둠이 내려앉은 새벽, 거기에 취기가 더해져 새로 산 스포츠카를 타고 내달리니 여태까지의 노력의 보상을 받는 기분이었다.
눈앞의 어둠을 부셔가며 시원하게 내달리던 그 순간, 어둠 속에서 자전거를 탄 남자가 불쑥 나타나 보였다. 미처 피할 틈도 없이, 그녀의 스포츠카는 그의 곁을 스치듯 지나쳤고, 이내 충격의 순간이 찾아왔다. '부딪혔어!' 순간의 공포와 함께 차체가 떨림이 느껴졌다. 그리곤 뒤쪽으로 남자의 몸이 차가운 도로 위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차는 급하게 멈춰 섰지만 이미 모든 상황은 이루어져 버렸다.
에이지는 심장이 쿵 쿵 뛰는 것을 느끼며, 숨죽여 사이드 미러에 비친 그를 찾아본다.
'움직이지 않아..'
술기운이 돌던 머릿속은 위험을 감지하고 그 어떤 비상작동이라도 한 듯 빠르게 정신이 또렷해졌다.
짧은 순간이지만 맑아진 정신만큼이나 불안과 함께 여러 생각들이 뒤엉켜 마음을 짓눌러왔다. 하나의 엄청난 사건이 일어난 후 온 세상이 숨죽인 듯 고요하게 그 상황을 지켜보는듯했다.
그렇게 잠시 몇 초간의 시간이 무거운 공기로 인해 멈춰버릴 것만 같았다. 좀 전까지 흥겹던 음악은 물에 잠긴 스피커에서 울리는 듯 아득하게 들려와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에이지는 양손으로 자신의 뺨을 치며 주문을 걸듯 “정신 차려”라며 낮게 중얼거렸다. 이 목소리는 자신에게 보내는 경고이자, 현실을 받아들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아스팔트에 비정상적으로 널브러져 있는 현수.
현수의 귀에서 빠져나와 바닥에 떨어진 이어폰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에이지의 신곡이 나오고 있었다. 차에서 내려 쓰러진 현수를 내려다보는 에이지의 표정은 생각보다 상당히 차분해 보였다.
그의 생사를 확인하려는 듯, 그녀는 천천히 몸을 숙여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 순간, 죽은 것 같던 현수가 눈을 뜨며 그녀를 바라봤다. 잠시 둘은 눈이 마주쳐 서로를 바라봤다. 그리고는 이내 무슨 말이라도 하려는 듯 현수의 낮은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그를 외면하듯 바로 그녀는 몸을 일으키고선 생각에 잠긴 듯 차갑게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사고 현장 주변을 살펴보며, 에이지는 무슨 결심을 한 듯 핸드폰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짧은 순간이지만 그녀는 지난날들을 생각했다. 긴 연습생 시절과 그룹 데뷔, 인기는커녕 멤버들과의 불화로 인해 일 년도 채 되지 않아 해체했었다.
그리고, 솔로 3년 만에 드디어 하나 터져 이 자리까지 온 것이다.
현재의 자리도 재능보다는 그녀 나름의 지독함과 억척스러움이 만든 결과였다.
그녀는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고작 이런 일로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게 할 순 없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 생각의 결론에 따라 아스팔트 위 자신이 친 남자를 뒤로하고 자신의 차로 향했다.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의 플래시를 켜 자신의 차량 이곳저곳을 살펴본다.
샛노란 에스터마틴 앞범퍼와 본넷이 조금 찌그러졌을 뿐 달리 떨어져 나가거나 부서진 건 없었다.
이내 차에 올라탄 에이지는 조금씩 전진하며 영점조절이라도 하는 듯 사이드 미러에 비친 현수를 바라본다.
그리고 후진 기어를 넣고 엑셀을 힘주어 밟는다.
'우으으으으앙~~ '
고급진 배기음과 함께 차량은 뒤로 튕겨져 나간다.
그것도 잠시 현수를 치기 직전에 그녀가 마음을 바꾼 듯 브레이크를 급하게 밟아 간신히 멈춰 세운다.
"하.. 이건 아니야.. 차에 흔적이 생기면 어떻게.."자신을 단속하고 집중력을 높이려는 듯 혼잣말을 되새겨본다.
그의 생사 살피려고 할 때 현수와 두 눈이 마주쳤던 순간이 원망스러워졌다.
"그냥 죽어버리지 도대체 왜 날 쳐다본 거야.. 이젠 그냥 갈 수도 없잖아.."
핸들에 고개를 박고 긴 한숨을 쉬던 에이지는 고개를 돌려 조수석을 바라보다 바닥에 있는 음료가 담긴 비닐봉지를 발견한다.
그리고는 그것에 대한 기억을 떠올려 되짚어본다.
몇 시간 전 한낮, 에이지는 자신의 차로 향하고 있었다. 그때, 한 남자가 갑자기 뛰어와 그녀의 시선을 끌었다. “에이지! 누나 팬이에요!” 현수는 숨을 헐떡이며 비닐봉지를 내밀었다. 비닐봉지 안에는 자신이 모델인 음료와 생수가 몇 개 담겨 있었다.
에이지는 후드티를 뒤집어쓰고 선글라스를 낀 채 햇살에 행여나 손이라도 탈까 봐 레이스가 달린 귀여운 장갑까지 끼고 있었다. 인기가 오르면서 이런 일이 잦아진 터라, 그녀는 익숙한 미소를 지으며 현수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에이지의 목소리에는 피로가 배어 있었지만, 외면에선 능숙한 멘트를 날렸다.
“너무 감사합니다! 날 더위에서 구해주셨네요.” 그녀는 가볍게 웃으며 음료가 든 비닐봉지를 받아 들었다.
현수는 그녀의 반응에 얼굴이 환해졌지만, 에이지의 마음은 복잡했다. 모처럼만의 여행인데 현수의 호의는 귀찮음에 가까웠다.
“혹시, 사진 한 장 찍을 수 있어요 누나?” 현수가 말을 이어왔다.
“어쩌죠.. 죄송해요” 에이지가 대답하며 기계적인 미소 지었다. “메이크업이..” 귀엽게 얼굴을 찡그리며 한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키며 자신의 스포츠카로 향했다.
팬의 응원은 반갑지만, 인기가 오르며 개인적인 여행에서 조차 그녀의 사생활을 조금씩 잠식해 들어오고 있음에 조금은 불편한 감정이 실려 음료가 든 비닐봉지를 조수석 바닥으로 무심하게 던져뒀었다.
기억을 되짚어 봤던 에이지는 바닥에 쓰러진 현수가 음료를 준 사람과 동일 인물임은 인지하지는 못했다. 단지 그녀는 비닐봉지에 자신의 지문이 묻었을까 생각해 봤던 것이다.
'그래 분명 그걸 받아 들 때 장갑을 끼고 있었어'
모든 생각이 정리된 에이지는 차분하게 차량 보관함에서 낮에 끼고 있던 레이스 달린 귀여운 장갑을 낀다. 조수석 바닥의 비닐봉지에서 음료를 쏟아내고는 차에서 내렸다.
현수에게 다가가 쪼그려 앉은 그녀는 마치 더러운 무언가를 만지듯 조심스럽게, 최대한 손에 닿지 않게 신음하는 그의 머리에 비닐봉지를 씌우기 시작했다. 그 순간, 에이지의 머릿속에는 다른 잔혹한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직접 목을 조르거나 근처에서 돌멩이를 주워와 머리를 찍어버릴까? 그러나 그건 너무 잔인할 것 같았다. 자신이 직접 살인을 저지르는 기분이 드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지금 자신이 하고있는 바보같은 짓이 최선이라고 믿었다.
마지막으로 비닐봉지 손잡이를 그의 목에 매듭으로 묶고 일어서서 확인하듯 내려다보았다. 그 모든 과정은 차분하게 진행됐다. 그리고 그 모습은 무미건조했고, 감정이 결여된 듯 보였다. 그런 뒤, 그녀는 자신이 저지른 잔인함을 외면한 체 자신의 차로 돌아갔다.
현수의 들숨과 날숨에 맞춰 비닐봉지가 부스럭거리는 소리 속에서, 에이지의 차는 천천히 떠나갔다. 비닐봉지의 공기가 다해 숨이 부족해지자 현수의 얼굴에 붙은 봉지가 그의 생명이 꺼져가는 과정을 선명하게 드러냈다. 에이지의 노란색 스포츠카는 그 모든 것을 뒤로하고, 차가운 밤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