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달 왔습니다!

현수막

by 삼류작자

'XX맨션 1008호'


그곳에 이렇게나 높은 건물이 있었던가?

내심 복잡한 곳이라 내키지 않았지만, 뭐 어때.
이미 임무를 수락해 버렸는걸.

무난하게 물건을 싣고 그곳으로 향했다.
밤이라 그런지 다행히 생각보다 덜 복잡했다.

내비게이션이 시키는 대로, 그냥 디립따 밀어 넣고 간다.

시장통 골목을 지나 코너를 꺾고, 오르막을 오르자—
갑자기 세상이 바뀌었다.

그곳에 있어선 안 될 것 같은 낡고 오래된 높은 건물과, 반듯하고 넓은 주차장.
그리고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공기마저 느껴졌다.


'...아니, 여기 이런 데가 있었어?'


마치 게임 속 숨겨진 맵을 우연히 발견한 기분이었다.
어떻게 보면 공포 영화나 중국 영화에 나오는 세트장 같기도 했다.

조금 둘러보다 대충 차를 세우고, 배달할 음식봉지를 들었다.


한 발, 또 한 발.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며 이 생경한 풍경을 눈에 담는다.

지역에서 알아주는 복잡한 건물.
그 옥상 위로 아파트가, 가운데 주차장을 두고 요새처럼 둘러쳐 있다.


'우와...여기서 참 오래 살았다 생각했는데,
이런 곳이 다 있었네.'

감탄에 젖어 걸어가며 괜한 혼잣말이 나온다.


시장통 속 복잡한 곳이라 여기던 그 중심에서, 찾아낸 생경한 풍경.
달빛에 적막마저 더해진 순간, 어디선가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날카로운 고양이 울음소리가 괜스레 음침하게 들려온다.

순간, 음식 봉투를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오래된 건물이라 그런지, 좁은 엘리베이터는 답답하게 느껴질 정도다.

10층을 누르자, '끼걱'~거리는 불쾌한 소리를 내며 엘리베이터는 올라간다.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어두운 복도를 따라 1008호에 물건을 내려놓고 임무를 완수한다.
그리고는 장난꾸러기가 초인종을 누르고 도망치듯, 중년의 나는 돌아서 잽싸게 엘리베이터를 탔다.

낯선 곳에 인기척조차 없으니, 괜히 음산하다.




이 재미진 쿠팡이츠가 아니었다면,
시내를 이렇게나 많이 누빌 일이 있었을까?

두어 시간식 임무를 따라 운전을 하다 보면
이렇게 도시의 낯선 면면과 마주치는 순간이 종종 찾아온다.

"와, 이런 곳이 다 있네."


정말로 놀랄 만큼 새로운 장소를 몇 번이고 발견했다.

그럴 때면, 가능한 한 차에서 내려 느긋하게 걸으며 구경한다.
익숙한 곳 속에 숨은 낯섦을 찾아다니는 재미랄까.

하지만, 돌아다니다 보면 정말 보기 싫은 것도 있다.




바로 정치인의 현수막이다.

내용은 대부분 저급하다.
상대를 깎아내리고 비방하는 글을, 때로는 혁명적인 글씨체로,
때로는 불쾌한 단어들로 도배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걸어둔다.

어쨌거나 저 현수막들, 결국엔 세금으로 만들어진 것 아닌가.
도시 미관을 망치는 건 둘째 치고,
볼 때마다 기분마저 잡친다.


심지어 산불과 아무 상관없는 지역인데 때맞춰 곳곳에

"산불 피해 주민 여러분, 빠른 회복을 빕니다"
라는 문구를 걸어놓은 건 또 뭐람.
‘나는 좃나게 착해요’라는 어필이라도 하고 싶은 걸까?

아무튼, 거리마다 넘쳐나는 저 정치 현수막들.
도시를 활보하다 보면 징그러울 정도로 많이 걸려 있다.

문득 생각했다.


'그렇다면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없던 정치 현수막이,
왜 이렇게까지 늘어난 걸까?'


2020년.
정당법을 뜯어고치면서 국회의원 김민철이 스타트를 끊었다.

정치적 입장을 알리고 당원을 모집한다는 명목으로,
읍면동마다 하나씩 현수막을 설치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줬다.

그리고 서영교 의원이 그 바통을 이어받아,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기준'만큼 설치할 수 있게 했다.

마지막으로,
김남국 의원이 일말의 양심 따윈 접어두고,
개수 제한 없이 마음껏 설치할 수 있도록 법안을 발의했다.

그렇게 세 사람의 법안을 한데 묶어
2022년 6월, 국회는 대안법안을 통과시켰다.

예전에도 정치 현수막은 있었다.

그건 대부분 불법이었고,
구청이나 시청에 신고만 하면 철거가 가능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걸고 싶은 만큼,
개수 제한 없이
거리마다 마음껏 내걸 수 있다.

그 후로도 몇 번 개정이 되어 선거를 앞둔 시점에는 제한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선거 이후의 기간이 더 길고, 더 지저분한 글이 끊임없이 내걸린다.




'XXXX 대한민국의 쾌거! 힘내자 대한민국!'
정말 대박이 나서 떠벌리고 싶은 신나는 일을 써갈긴

기분 좋은 문구도 사방에 도배하면 짜증이 날 판인데,
이건 뭐, 사거리마다, 동네 입구마다,
시민들 마음 한구석에 세뇌라도 하려는 듯

혁명적인 글귀들과 서로를 향한 비방이 널브러져 있다.

법을 만드는 자들이 통제 없이
자기들 편의를 위해 법을 만들었으니,
결국 이런 꼴을 안 볼 수가 없게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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