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 옥곡에서 북동쪽으로 길을 잡는다. 진상면을 지나며 완만한 오르막이 시작한다. 땀을 흘리며 한참을 올라서 발아래 들녘과 산을 바라보는 것은 도보여행만의 달콤함이다. 자동차로는 아무리 높은 곳에 올라도 맛볼 수 없다. 탄치재를 넘어 무동산 자락을 끼고 돌자 드디어 섬진강이 보였다. 저 강을 건너면 경상도 땅이다. 광양은 국내 최대 매실 생산지답게 걷는 내내 매실나무가 무성하다.
땡볕에 그늘진 쉴 곳이 마땅치 않았다. 광양 진상면을 지나다가 마침 깔끔한 농장 마당에 그늘이 있어 주인에게 양해를 구하고 쉬고 있자니 커피와 시원한 물을 내오신다.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이곳은 백운산 굼(꽃)벵이농장이다. 식용굼벵이를 꽃벵이로 부르는데, 유충의 종류가 다르단다. 굼벵이는 풍뎅이나 딱정벌레의 유충을 통칭한다. 꽃벵이는 흰점박이꽃무지 유충의 애칭이다. 올해 식약청은 꽃벵이를 일반 식품으로 인정했다. 이 유충은 동의보감에 약재 원료로 명시되었고, 고단백 식품으로 심혈관 질환과 간 기능 개선, 당뇨 및 항암에 효과적이라 한다.
농장주 이종기 님은 나와 같은 베이비붐 세대다. 오래전 공직생활을 접고 귀촌 생활도 했으나 몇 년 전 이 사업으로 제2의 삶을 시작하였다. 이유는 두 가지. 가진 재산으로 곶감 빼먹듯 사는 것도 문제가 있고, 평균수명이 늘어나는데 나이 들어 할 일이 없으면 그 삶 또한 의미가 적을 것 같기 때문이다. 맞다. 나나 우리 세대 누구나 가장 큰 관심은 노년의 삶이다. 이종기 님은 인생 후반부에 과감히 새로운 삶을 개척했다.
농장 시설도 견학했다. 규모가 꽤 크다. 꽃벵이 먹이인 톱밥 발효를 포함한 모든 작업은 4개 동 실내 공장형 농장에서 이루어진다. 그는 손수 4차까지 발효시킨 톱밥을 사용한다. 철저한 온도와 습도, 위생관리로 꽃벵이를 키운다. 꽃벵이 농장은 세심한 관리로 놀랄 정도로 깔끔하다. 미래 먹거리는 곤충이 대세라고 언론에서 보도하고 있고, 4차 산업에서도 농업이 포함되어 있다. 이종기 님의 사업이 번창하여 제2의 삶이 성공하기를 바란다.
<할머니들의 호의>
걷다가 마실 나온 할머니 할아버지를 만나면 모자를 벗고 인사드린다. 반가워하신다. 마을 길을 걸을 때면 조용하다. 마을에 빈집이 늘어나고 있다. 시골 노인들의 외로움도 반갑게 인사를 받는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어느 할아버지는 나의 인사를 받고는 마을에 돌아온 동네 사람인가 싶어 “여 어디 사는 누고?” 물으셨다. 이 마을 사람이 아니라며 다시 인사드리자 웃으셨다. 어제도 어느 할머니께 인사드렸더니 나를 붙잡고 한참을 말씀하셨다. 울산 사는 사위가 배 만드는 큰 회사에 다닌다며 자랑도 빼놓지 않았다. 할머니는 몇백 미터 떨어진 자신의 집에 가서 커피라도 먹고 가라 하셨다. 오늘 걸어야 할 거리와 시간, 할머니 집까지 왕복 거리를 계산하며 정중히 거절하였다. 나는 걸으면서도 도시의 계산적 생활의 때를 벗지 않았다.
남도 끝자락이어서 그런가, 길가에 야자수가 줄지어 서 있다. 며칠 전 어느 마을 앞 야자수 길에서 할머니께 인사드렸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길어지자 집에 가서 밥 먹고 가라고 하셨다. 할머니가 해주시는 집밥도 먹고 남도 할머니의 살아온 이야기도 들을 좋은 기회였다. 하지만 도착지까지는 5~6km가 남았고 그날따라 나는 너무 피곤하였다. 죄송한 마음으로 거절하였다. 다시 생각하니 피곤하더라도 죽을 만큼은 아니므로 할머니 성의를 봐서라도 말벗도 되어드리고 밥도 같이 먹어야 했다. 아무리 외로운 시골 노인이라도 낯모르는 이를 집으로 초대하기가 쉬운가. 나는 할머니들이 내민 순수한 정을 뿌리쳤다. 과연 나의 도보여행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유쾌한 개인택시 기사>
어제 도착지 횡천면에는 숙박할 곳이 없어 하동읍으로 나왔다. 버스 시간을 알아보는 사이에 노선버스가 지나갔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지방에서는 버스 시간 간격이 길다. 여기에서 두세 시간 정도 기다려야겠기에 마음을 비우고 길가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때 택시 한 대가 내 앞에 서며 하동까지 3천 원만 달랜다. 10km가 넘는 거리라서 횡재에 가까웠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차에 올랐다. 육십 대 초반의 기사는 유쾌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군청 운전직 공무원으로 근무하다 정년 몇 년을 앞두고 명퇴금 받아 나온 그는 개인택시를 9천만 원에 구매했단다. 연금도 월 250만 원 받고, 택시 수입도 200만 원쯤 된다. 은근히 부럽다. 개인택시를 자가용 겸 이용하는데 세금도 싸고 운영비도 적게 든다. 노인 택시기사가 사고를 많이 일으켜서 문제라며 열을 올리면서도 유쾌하다. 조기축구회며 여러 가지 활동도 한다. 자신은 군청 일을 하면서도 즐겁게 일했단다. 활력이 넘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을 만나면 나도 기를 받는다. 며칠 전 무척 기분 좋은 일이 있었단다. 낯모르는 지리산 둘레길 여행자가 전화로 승차 요청을 했는데, 어떻게 알고 전화했나 물어보니 블로그에서 봤단다. 얼마 전 태운 승객이 블로그에 자신을 소개했다는 것이다. 입담이 좋아 듣는 재미에 금세 하동에 도착했다. 유쾌한 사람을 만나면 나도 덩달아 유쾌해진다. 나를 보며 주변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오전에는 씩씩하게 걷는다. 오후가 되면 속도가 뚝 떨어지지만 걷는 맛은 좋다. 내일은 사천 땅으로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