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은 순천과 인접해 있다. 동쪽에 제철소와 항만, 산업시설이 들어서며 동광양 신도시가 조성되어 서광양과 동광양으로 나뉘었다. 순천과 광양은 넓은 도로로 맞닿아 있다.
제철소, 산업단지와 연관되어 대형차량의 통행이 빈번하고 대부분 과속으로 달린다. 나는 길 가장자리에 붙어서 걸었지만, 자칭 도보여행 달인인 나도 빗속에서는 위험을 느꼈다. 남해고속도로와 인접한 교차로에서 하동방면으로 가려면 우측으로 빠져 일방통행로를 따라 휘어진 길을 따라가야만 한다. 여기서는 자동차 진행 방향으로 걸어야 하기에 더욱 위험하다. 그동안 걸으며 오늘처럼 자동차에 온 신경을 쓴 적이 드물다. 사람이 길을 놓았지만, 새로 닦은 이 길에서 ‘사람’은 있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고가 차도 교차로에서 직진하기 위해 고가 나들길 무단횡단도 감행했다.
아침부터 촉촉하게 비가 내린다. 바람에 날리던 빗줄기가 점차 굵어졌다. 숙소를 나서며 우산을 펼쳤다. 배낭에도 우비를 입혔다. 가볍고 작은 3단 우산으로는 내 상반신만 겨우 가릴 뿐이다. 바람이 불면서 안경까지 비가 들이쳤다. 이내 바짓가랑이가 축축이 젖었다. 얼마 후 다행히 가랑비로 바뀌었다. 순천 시내에서는 인도로 걷기 때문에 우산을 쓰고 걸어도 상관없지만 외곽 차도에서는 우비를 꺼내 입었다.
비 올 때는 쉴 곳을 잘 찾아야 한다. 아직 문을 열지 않은 기사식당 앞에 비 피할 마땅한 자리를 발견하였다. 휴대용 의자를 펴서 앉았다. 작년 3년 차 도보여행부터 가벼운 낚시 의자를 가지고 다녔다. 휴식 취할 때 맨바닥에 앉으면 불편하고, 비 올 땐 서서 쉬어야 했다. 무게가 문제여서 알루미늄 틀의 초소형으로 장만했는데 톡톡히 효자 노릇을 한다. 식당 앞에서 늘 하던 대로 양말 벗고 발에 베이비파우더를 바르고 있었다. 비 올 때는 더 축축해지므로 세심히 파우더를 발랐다. 그때 식당 주인 여자가 옆 골목에서 나오다 나를 보고는 흠칫 놀라며 경계의 눈빛을 날렸다. 늙수그레한 남자가 식당 앞에서 양말을 벗고 발에 하얀 분칠을 하고 있으니 어느 누군들 예사롭게 보겠는가. 노숙자로 보기에 충분했다. 뭐 하는 사람이냐는 물음에 여차여차 도보여행하는 사람인데 비를 피하러 여기 앉았노라 말하고 양해를 구했다. 그제야 경계심을 푼 것 같았지만 나는 그분에게 부담을 주기 싫어 이내 일어섰다.
대형트럭이나 버스가 지날 땐 물보라가 광풍처럼 휘몰아치며 우비를 공격했다. 비가 와도 자동차는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평소에 나도 운전하며 그랬다. 물이 고인 곳을 지날 때 조심하지만 오늘도 어김없이 차가 지나며 동시 다연발 물총을 퍼부었다. 아카시아꽃이 비바람에 꽃비가 되어 길가에 쌓였다. 빗줄기가 잦아들자 아카시아꽃 향기와 다른 꽃내음이 은은히 풍겼다. 샛길로 접어들었다. 싱그러운 풀냄새도 객을 반겼다. 그래, 이 맛이 있기에 걸을 만하다.
<순천과 무진>
순천만 갈대로 잘 알려진 아름다운 도시 순천은 소설가 김승옥 님의 『무진기행』으로도 유명세를 치렀다. 무진은 가상의 지명이고 작가는 순천을 두고 이 소설을 썼다. 고향 무진을 찾은 주인공의 허무와 고독을 안개와 함께 그려낸 수작이다. 순천만 국가정원과 순천만 습지는 많은 이들이 찾는 명소다. 순천만 습지에는 문학이 흐른다. 순천만문학관이다. 이곳에는 소설가 김승옥과 동화작가 정채봉의 문학세계가 전시되어 있다. 문학관 측에서는 전시관 내 김승옥 작가의 생활 거처를 마련하여 몸이 불편한 노 작가가 잠시 머물 수 있도록 하였다.
아름다운 도시 순천은 한때 ‘여순반란사건’ 즉 반란 지역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여수 순천이 반란 지역이 아니라 오히려 이념 대립의 희생양이었기에 명칭도 ‘여순사건’으로 변경되며 오명을 벗었다.
여순사건에서 반란군과 좌익 동조자뿐만 아니라 국민을 보호해야 할 아군 토벌대에 의해 무고한 양민 다수가 비극적으로 살해되었다. 피해 지역은 여수 순천 광양 보성 고흥 구례 등 전라남북도와 경상남도까지 광범위하다.
좌우 이념과 무관한 양민들이 죽어간 이 사건에 작가들은 문학으로 아픔을 표현했다. 작고한 수필가 정영기 선생은 작품 「향기 나는 비녀」에서 고향 마을의 아픔을 전했다. 여순사건 때 국군 토벌대는 다수의 마을 남자들을 같은 날 한꺼번에 처형했다. 한날한시 남편을 잃은 아낙들은 기일이 되면 밤중에 소복만 입은 채 모여 소리도 내지 못하고 울음을 삼켜야 했다. 억울한 죽음이었지만 빨갱이 가족으로 내몰린 가족들은 슬픔조차 토해내지 못했다. 어렸을 적 그 모습을 본 작가는 집 앞에 핀 하얀 옥잠화를 보며 소복의 기억을 소환하였다.
또 다른 작가의 글에서 우리는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한 민초들의 몸부림을 읽는다. 작가 부친은 사위를 잃고 딸마저 정신을 놓았다가 얼마 후, 남편을 따라 이승을 떠난 아픈 사연을 겪으며 무너지는 가슴을 안고 분노도 삭인 체, 자식들에게 ‘남에게 척 지지 마라’ 당부하신다.
어찌 여순사건만이랴. 제주 4‧3도 그렇다. 해방 후 이념 대립으로 소용돌이치던 한반도에서 이념은 몇몇 그들만의 언어였으나 정작 죽어 나간 사람들은 좌가 무엇인지 우가 무엇인지 모르던 양순한 사람들이었다. 오늘날에도 남과 북의 몇몇 권력자들이 집권에 눈이 어두워 이념의 망령을 무기로 서로를 적대시하며 칼춤 추고 있으니 억울하게 죽은 영령들이 저승에서 슬피 울고 있을지 모르겠다.
서광양을 벗어나 남해고속도로를 따라 광양 옥곡까지 58번 지방도로를 걸었다. 도착지 옥곡에서 여관이 보이지 않아 면사무소에 들러 물어보니 인근 골목에 하나 있단다. 커피까지 타주는 친절함에 피로가 가신다. 무려 500년의 역사를 지닌 옥곡 오일장은 새로 단장하여 옛 모습은 한 군데도 남아 있지 않다. 저녁으로 돼지국밥을 먹으며 국물까지 다 비웠다. 오백 년 전에는 어떤 국밥이었을까? 내일은 전라남도를 떠나 경상남도 하동 땅에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