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7시 숙소를 출발해 얼마 가지 않자 구불구불 휘어진 오르막길이 시작되었다. 오르막이라도 직선으로 뻗은 길은 지루하여 힘이 더 든다. 작년, 문경새재를 넘고 제천 방향으로 길을 틀며 이어진 월악산 지릅재가 그랬다. 이미 문경새재를 넘어서 체력이 떨어진 탓도 있겠으나 약간의 굴곡만 있을 뿐 직선 오르막길에서 걸음이 더욱 무거웠다.
오늘 아침 황토재 오르막 2km 길은 경사도 완만하고 계속 굽이치는 데다 아침의 상쾌함까지 더해 아름다웠다. 그러다 문득 내 눈에 산지사방 온통 녹색으로 뒤덮인 광경이 들어왔다. 어제도 그저께도 그랬지만 오늘에야 알게 된 것이다. 재를 넘으며 길가의 들풀도, 은행나무 가로수도, 산도 들도 온통 녹색이다. 논에 채운 물 위로 삐죽 얼굴을 내민 어린 모도 녹색이다. 아직 갈아엎지 않은 논과 밭에서 무성하게 자란 잡풀도 녹색이다.
지난 3년간 남쪽에서 북쪽으로 걸을 때는 늘 4월이었다. 아랫녘에서 개나리와 벚꽃을 보며 걷기 시작했다. 나는 북으로 걸었고, 봄꽃은 나의 발걸음에 맞춰 계속 피어주었다. 북으로 가는 내내 노란색과 흰색에 파묻혀 걸었다. 벚꽃이 꽃비가 되어 내 머리에도 얼굴에도 손에도 내려 나는 늙수그레한 꽃돌이가 되었다. 산에도 노란색과 흰색, 붉은색이 곳곳에 둥지를 틀었다.
그런데 5월의 산야는 오로지 녹색의 향연이 펼쳐질 뿐이다.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녹색의 나뭇잎이 얼마나 아름답고 신선한지 이 나이 들어서야 제대로 느꼈으니 나도 참 둔하다. 녹색은 눈의 피로를 덜어준다. 이참에 눈의 피로뿐만 아니라 마음의 눈에 낀 때와 피로도 벗기고 싶다. 그래서 홀로 길 떠나는 것이련만.
<하동 북천 양귀비꽃 축제>
도로변에 빨간 꽃 한 송이가 요염한 자태를 뽐낸다. 얼마간 더 걷다 보니 이 꽃이 들판을 덮었다. 쌀농사를 짓던 하동군 북천면 직전마을 주민들은 논에 꽃양귀비를 심었다. 마약 성분이 없는 관상용 양귀비다.
쌀값은 내가 결혼한 1985년에 20kg 한 포대에 이만 원 이내였는데, 사십 년 가까이 지난 지금 사만 원 밑으로도 살 수 있다. 대대로 지어온 논농사를 작파하고 꽃을 심은 농민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쌀은 여타 작물과 달리 우리 민족에게는 목숨과도 같았다. 가뭄에 물꼬 싸움은 이웃을 원수로 만들었다. 한 톨의 쌀알도 소중했다. 농민들은 그런 논을 갈아엎었다. 쌀이 생명이라는 명분은 농민들의 먹고사는 문제 앞에서 빛을 잃었다.
이곳 마을주민들은 생각의 틀을 바꿨다. 그리고 봄가을 꽃축제를 준비했다. 5월에는 꽃양귀비 축제, 가을에는 메밀꽃과 코스모스 축제를 연다. 벼 대신 꽃을 심었기로서니 누가 뭐라고 흉볼 수 없다. 식량 안보 차원에서도 국가는 농민들이 생산한 쌀이 다양하게 소비되도록 방안을 강구했어야 했다.
수많은 직장인이 중도 퇴직당하여 600만 자영업자 대열에 합류하다 망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이것도 사회 구조적 문제이므로 국가는 방안을 세워야 한다. 하물며 쌀농사를 농민 개개인이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안보 차원에서도 옳지 않다. 남는 쌀은 늘 식량이 부족한 북한 동포에게 보낼 수도 있잖은가. 우리의 경제 규모로는 충분하다.
서시와 초선, 왕소군, 양귀비가 중국 4대 미녀라 했던가. 양귀비 미모에 꽃이 그만 부끄러워 잎을 말아 올렸다는데, 과연 새빨간 양귀비꽃은 매혹적이다. 바람이 불자 넓은 꽃잎은 스스로 말아 올리는 듯 하늘거린다. 주차장에는 관광객들이 타고 온 자동차로 빈틈이 없다. 여러 대 관광버스에서 중·노년들이 쏟아져 나오며 5만 평에 이르는 들판이 원색으로 향연으로 뒤바뀐다. 빨간색 노란색 청색의 등산복을 입은 여인들이 떼로 양귀비밭을 휘젓고 다니자 꽃은 그만 잎을 말아 올린다. 자신보다 형형색색 더 화려해서 일 게다. 마을 안 평상에서 가족 단위 나들이객이 음식을 펼쳐서 맛있게 먹고 있다. 나도 배가 고파서 빈자리 앉아 빵과 구운 계란을 꺼내어 먹었다.
<오늘의 이모저모>
국도 2호선과 곤양천을 따라 동으로 동으로 향한다. 완사역 주변 곤양면 중심지에서 늦은 점심으로 밀면을 사 먹었다. 점심으로 식당 음식을 먹은 건 며칠 만이다.
도로변에 와인갤러리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땀 냄새가 폴폴 풍기지만 그냥 지나칠 수 없다. 경남 사천 곤명면 경전선 옛 기차 폐터널을 와인갤러리로 꾸민 것이다. 터널 안 공기가 더없이 시원하다. 여기서는 이 지역 특산인 다래로 와인을 만들었다. 무료 시음으로 맛본 다래 와인은 포도 와인 보다 부드럽다. 이번 축제 기간 중 성악, 국악과 밴드공연, 독특한 화풍의 화가 문명숙 초대전도 함께 열리고 있다. 눈과 입과 몸의 호사로다. 터널 내 와인 저장고 특유의 분위기에 더해 화려한 장식과 미술작품이 잘 어울린다.
오늘은 걸으며 볼거리가 많았다. 술꾼들에게는 무엇보다 좋은 술이 최우선인 것처럼 도보 여행자에게는 마음에 드는 길을 걸을 때 행복하다. 아침에 걸었던 나무가 무성한 구불구불 오르막길 그리고 황토재 정상에서 숲으로 터널이 된 샛길을 발견해 걸을 때의 기쁨은 최고다. 홀로 걷는 맛이 새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