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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에서 만난 백이 숙제 - 66화

경남 함안

by 조성현

함안에서 만난 백이 숙제 / 함안


국토횡단 13일 차(5월 16일)

진주시 진성면~사봉면~어석재~함안군 군북면~함안군 27km / 누계 328km

진주 진성면을 출발하여 따가운 햇볕을 맞으며 사봉면을 지나 어석재를 넘었다. 어석재는 460m 괘방산 등산로 들머리이며, 여기에서 진주시 사봉면과 함안군 군북면이 갈린다. 고갯마루에서 쉬며 다리 한 짝은 진주시에 다른 한 짝은 함안군에 걸치고 앉았다. 행정구역이 갈리는 고갯마루에서 종종 이렇게 앉아 쉬곤 했다.


어석재를 넘어가자 하얀 벽에 까만 기와지붕을 얹은 함안조씨대종회(咸安趙氏大宗會) 건물이 육중하게 다가왔다. 이곳은 어계(漁溪) 조려(趙旅)가 태어나고 여생을 보낸 곳이어서 그의 자취가 곳곳에 남아 있다. 그는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관직을 버리고 낙향한 생육신 중 한 사람이다. 고향에서 정자를 짓고 은거하면서 계곡에서 물고기를 잡으며 여생을 보냈다 하여 어계(漁溪)라 하였다.


이 일대는 충절의 대명사 백이(伯夷) 숙제(叔齊) 일색이다. 산과 봉우리도, 서원과 정자도 모두 그들과 연관이 깊다. 이유가 뭘까. 숙종은 단종을 복위하면서 생육신 조려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킨 백이 숙제와도 같다며 칭송하였다. 그의 고향 앞산인 쌍안산을 백이산으로 바꾸고 그 아래 봉우리도 숙제봉으로 바꾸라 명하였다. 두 봉우리가 몸은 조선에 머리는 중국으로 뚝 떨어져 400년 넘도록 생이별하고 있으니 억울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숙종 연간 영남 유림은 제향을 지내기 위해 이곳에 사당을 지었다. 숙종은 서산서원(西山書院) 편액과 제물을 내려보내어 사액서원으로 지정하였다.


왜 조선 19대 왕인 숙종이 7대 왕이자 세조인 자신의 조상 할아버지에 반기를 든 생육신을 칭송하였을까? 숙종은 본인과 자신의 직계 이외에는 누구도 왕 노릇을 못 하게 하려는 듯, 아니면 다른 성씨가 왕조 교체를 획책해서는 안 된다고 쐐기를 박으려는 듯, 불사이군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아닌가 싶다. 조려가 기거했던 정자 이름은 채미정(采薇亭)이다. 채미는 고사리를 캔다는 뜻이다. 백이 숙제가 고사리를 캐며 부른 노래가 채미가이고, 첫 구절에 서산(西山)은 그들이 굶어 죽은 수양산이다.


누가 백이 숙제를 이용하였을까. 중국 주나라는 상(商) 나라(은나라)의 제후국 즉 신하 나라였다. 주나라 무왕은 부친 상중에 전쟁을 일으켜 상나라를 멸하였고, 주나라 땅에서 나는 곡식을 먹지 않겠다던 이들이 백이 숙제 형제다. 이들의 주장은 무왕이 부친의 장례도 치르기 전에 전쟁을 일으켰으니 불효이고, 신하가 임금을 죽였으니 불충이라는 것이다. 효(孝)와 충(忠)은 유교의 근간이므로 공자의 나라 중국이나 국시가 성리학인 조선에서 백이 숙제를 추앙하였지만, 속내는 다르지 않았을까. 무조건 임금에 충성하라는 것이니 기존 왕조 입장에서는 백이 숙제가 더할 수 없이 필요한 도구였다. 역성(易姓) 쿠데타로 왕조를 세운 이들은 백이 숙제 눈에 불충이지만 그런 왕조가 세월이 지나며 쿠데타 방지용으로 두 형제를 끌어들여 이용하였다. 인(仁)이나 의(義)를 내세워 왕조와 왕좌의 안위를 꾀한 것 아닌가 싶다.


백이 숙제가 주장한 충절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첫째, 무왕의 상중 거병을 불효라 하였지만, 국가 대사가 개인의 부친상으로 좌우된다면 그것은 국가에 대한 불충이다.

둘째, 역사에서 영원한 임금과 신하는 없다. 왕조는 계속 바뀌었다. 종족은 다르지만, 원나라 땅에서 나는 곡식을 먹고 살아온 주원장이 중국 땅에서 원나라를 몰아내고 명나라를 세운 불충(?)을 저질렀는데, 어찌 백이 숙제를 추앙하는 조선의 왕은 명을 사대할 수 있다는 말인가. 고려의 신하 이성계도 고려를 멸하고 조선을 세웠으니 백이 숙제의 논리에 따르면 불충한 자였다. 그들이 주장한 불충은 근본부터 오류였다.


셋째, 맹자 「양혜왕 하」 편에서는 “군주다움을 상실한 군주는 한 명의 무도한 사내에 불과하다”라며 주나라 무왕은 임금을 죽인 게 아니라 폭정을 일삼은 사내를 죽인 것이라 하였다. 실제 상나라 주왕은 주지육림에 빠진 폭군이었다. 백성을 구하는 일이 개인 주왕의 부친 장례보다 중하고, 백성을 억압하는 자는 더 이상 임금이 아니므로 불충은 더더욱 아니다. 백이 숙제가 고사리를 캐 먹은 것을 두고 어느 시조에서는 “고사리도 누구의 땅에서 났는가, 굶어 죽을지언정 고사리를 뜯어 먹어야겠는가”라고 조롱하였다.


그런데 백이 숙제와 사육신, 생육신은 가장 주요한 문제를 간과했다. 그들이 저항했던 왕조 교체나 왕위 찬탈에 백성은 안중에 없었다. 이들이 내세운 명분인 충(忠)은 오로지 권력자를 향했을 뿐이다.


어느 왕조든 건국의 명분은 나라의 기틀을 다시 세우자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집권이라는 권력의지가 주된 요인이었음을 역사는 말해준다. 고려나 조선의 건국이 그랬다. 주나라 무왕은 은나라가 권력층의 폭정으로 기울자 부친의 장례도 치르기도 전에 발 빠르게 선수를 쳐서 권력을 잡은 것은 아닐까. 세조도 마찬가지다. 어린 단종이 무능하거나 폭압적이어서 조선이 흔들렸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무왕의 왕조 교체나 세조의 왕위 찬탈은 그들만의 권력투쟁이었다.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다. ‘민본(民本)’사상은 『서경』에서 등장하고 맹자도 언급할 정도로 오래되었다. 비록 현대의 주권재민과는 거리가 있고 통치의 객체로서 민본주의가 등장하였으나 예로부터 백성을 천시하는 권력은 멸망을 면치 못하였다. 백성이 배제된 백이 숙제나 사육신, 생육신의 충절과 추앙은 이런 측면에서 재해석 되어야 한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래 장기 집권 또는 군사 정변이 발생했을 때 국민이 저항한 이유는 인민의 자유와 인권, 삶의 가치가 훼손되기 때문이다.


채미정에 들어섰다. 采薇亭 현판을 가운데 두고 좌우로 淸風 百世 현판이 주 현판을 압도한다. 정면 4칸 측면 3칸 팔작지붕으로 무게감과 품위가 느껴지는 중년 남성의 모습이다. 다만 정자 앞 연못을 가로지른 시멘트 다리와 철봉 난간이 정자의 멋을 깎아 먹는다.

생육신 제향을 위해 세워진 서산서원은 그동안 함안 조씨 종친회에서 관리하였다. 운영에 어려움이 있어 지방문화재로 지정을 추진하고 있는데 서원 본채 앞 양옆에 사자석과 홍살문 뒤 삼문(외삼문과 내삼문이 없음) 앞의 왜색풍 작은 연못 때문에 추진에 어려움이 있단다. 함안 땅을 지나는 도보 여행자가 생육신 조려의 발자취를 보며 백이 숙제까지 멀리도 나갔다.


20170516_112155.jpg 어석재 오르막 길
20170516_112337.jpg 어석재 정상
20170516_115612.jpg 어석재 내리막 길
20170516_121104.jpg 채미정 출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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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16_121222.jpg 어계 조려가 기거했던 채미정
20170516_121247.jpg 우측 시맨트 다리와 철제 난간이 보기 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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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16_121326.jpg 채미정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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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16_124027.jpg 서산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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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16_124432.jpg 서상서원 내 팔각 건축물(어울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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