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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야만 잘 보인다 - 68화

by 조성현

떠나야만 잘 보인다 / 마산


횡단 14일 차(5월 17일)

함안군~마산대학교~마산역~국립 3‧15민주묘지~창원역 25km / 누계 353km


오늘까지는 걸으면서 지저귀는 새소리를 자주 들었다. 내일부터 창원에서 부산으로 이어지는 길은 산업단지를 끼고 있어서 주로 4차선에 차량 통행이 빈번한 길이 이어질 것이다.


집 떠나 걷다 보면 새소리가 잘 들린다. 어제 오후에는 한적한 곳에서 휴식을 취하는데, 여러 마리 까마귀가 내는 합창 소리를 들었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착한 새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흉조라 하는데, 길손에게는 까마귀 소리도 반갑다.


길 떠나야만 새소리가 들릴까? 그러고 보니 작년 이맘때 빼고는 서울에서 새소리 들어본 기억이 희미하다. 작년 도보여행 마치고 얼마 지났을 때였다.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를 걷다가 참새 소리를 들었다. 아니, 참새의 지저귀는 소리가 내 귀에 들어왔다는 표현이 맞다. 놀라웠다. 공중에 여러 마리 참새가 날고 있었다. 왜 그동안 보지도 듣지도 못한 건가. 시골만큼은 아니어도 도시에서도 참새는 살고 있다. 새소리가 없는 게 아니라 내가 귀를 막고 있어서 못 들은 것이다. 불과 수십 일 동안이지만 나무와 풀 가까이에서 걸으며 새소리를 듣다 보니 한동안 내 귀가 열린 것이리라.


회사 퇴직하고 개인사업을 시작할 때였다. 먹고 살 정도는 되는데, 회사 다니는 지인들이 승진하며 소위 잘나간다는 소식을 접할 때 부러웠다. 오랜 직장 생활의 때를 벗지 못한 것이다. 때를 벗기고 싶었으나 일터와 집을 오가는 일상 속에서 쉽지 않았다. 원점에서 뱅뱅 돌고 있는 나를 다잡기 위해서는 어디론가 떠나 혼자 있고 싶었다.

경상북도 왜관에 있는 천주교 연화리 피정의 집을 찾았다. 마침 이용자가 없어서 그 큰 시설에서 혼자 지냈다. 이른 아침에 미사에 참례하고 명상과 독서로 며칠을 보내다 귀가했다. 번뇌는 아직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몇 달 후 구례 화엄사를 찾았다. 이곳 템플스테이 수련관에서도 이용자는 나 혼자였다. 매일 새벽 세 시 반에 시작하는 새벽 예불, 참례가 의무는 아니지만 매일 각황전에 올랐다. 예불 마치고 탑돌이를 하며 생각에 잠겼다. 낮에는 종일 독서와 글쓰기 그리고 법당 한구석에 앉아 명상에 잠겼다.


때가 많이 벗겨진 느낌이 들었다. 개인사업 시작하며 고객들에게 나는 “아저씨”였는데, 그 호칭에 적응하지 못했다. 알몸으로 목욕탕에 들어가면 사장이고 말단사원이고 구별이 안 된다. 양파껍질 벗기면 나오는 뽀얀 속살을 벗기고 또 벗겨도 매양 한 가지이건만, 나는 어찌하여 껍질을 벗기지 못하고 끙끙대고 있을까. 절에 다녀오고 나서 호칭의 어색함이 사라졌다. 지인들의 동향도 무관심해졌다.


그런데 왜 집에서는 생각 정리가 안 되었을까?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데 마음먹기 달린 것 아닌가? 불교의 승려는 참선 수행으로 동안거나 하안거를 한다. 천주교 사제나 수녀는 기도의 집에서 40일 묵언 수행을 한다. 수도자들도 일상에서 벗어나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 하물며 나같이 잡생각이 많은 범부가 어떻게 집에서 나를 돌아볼 수 있을까. 노래 가사 내용이 맞다.

“제 자리에 머물면서 왜 알 수 없는 걸까, 멀리멀리 떠나야만 왜 내가 잘 보일까.”


<국립 3‧15민주묘지 참배>


창원에 가면 국립 3‧15민주묘지에 가볼 일이다. 이곳은 이승만 정권이 일으킨 3‧15 부정선거에 항거하다 목숨을 바친 마산시민들을 애도하고 기리는 곳이다. 1960년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김주열 군의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시신이 떠올랐다. 마산시민들은 독재 정권의 만행을 규탄하였고, 경찰은 시민들에게 총을 쏘아 수십 명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3‧14 마산의거는 4‧19혁명의 기폭제가 되었고,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은 권좌에서 물러났다. 3‧15 민주항쟁은 1979년 부마 민주항쟁과 1980년 광주 민주항쟁, 1987년 6월항쟁으로 이어지는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민주화의 중요한 변곡점이라 할 수 있다. 부산 마산은 불의에 저항하는 정신이 살아 있었다.


마산은 오래전 출장길에 잠시 들렀을 뿐이어서 3‧15민주묘지 참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남해고속도로 밑을 지나 민주묘지 진입로에는 ‘3‧15 義擧 詩가 있는 길’이라는 안내석이 서 있고 진입로를 따라 3‧15의거에 관한 시비(詩碑)가 참배객을 맞는다. 유영봉안소에 들어가 영령들께 참배를 올렸다. 이곳의 규모는 5‧18민주묘지에 비해 작다. 희생자 수가 광주에 비해 적고 군대가 동원되지 않았다는 점이 다르지만, 현대사의 전환점에서 마산시민들의 의거는 전혀 작지 않다.


<진등재수필문학회>


진등재수필문학회는 마산 창원 진주 김해 함안지역을 중심으로 백남오 교수가 이끄는 경남대학교 평생교육원 <백남오 수필창작 교실> 회원들로 구성된 문학회다. 백남오 교수는 수필가이자 문학평론가이며 국어 교과서 작품수록 작가이자 지리산을 3백 회 이상 등반한 지리산 수필가로 알려져 있다. 진등재는 경남 의령과 합천을 가르는 미타선 능선 이름으로 백남오 지도교수의 고향에 있는 고개다.

내가 국토횡단 한다는 소식을 듣고 문학회 이장중 회장과 송준점 사무국장이 저녁 식사에 나를 초대했다. 푸짐한 음식과 함께 두 분의 따뜻한 마음이 전해졌다. 식사 후 진등재문학회 회원들이 자주 모이는 아지트 ‘지중해’로 향했다. 마산의 구시가지에 있는 자그마한 호프집이다. 우리는 문우(文友)로 우정을 나누었다. 문우(文友)란 말 그대로 글 벗이다.


근세까지 문학은 구전을 제외하면 문자를 아는 극소수의 전유물이었다. 문맹자가 줄어든 현대로 넘어오면서도 시나 소설 등 문학 생산은 소수의 식자층에 한정되었지만, 디지털 시대가 열리며 누구나 글 쓰는 시대가 되었다. 또한, 삶의 경험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수필 문학이 자리 잡으며 문학 생산은 일반 대중에게로 확산하였다. 수필이 자신의 삶과 사유를 글로 표현한 장르이므로 주 생산 계층은 중년 이상이 대부분이다. 젊어서 문학을 동경하고 꿈을 꾸었으나 생활 현장 속에서 지나쳐야만 했던 그들은 생의 한 고개를 넘기며 하고 싶은 말을 글로 풀어내고 싶고 또 다른 삶을 원했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 자기가 쓴 글을 발표하고 토론하며 우정이 깊어지고 제2의 죽마고우 즉 문우가 되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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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17_120102.jpg 마산으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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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17_151507.jpg 3.15으거 도화선이 된 김주열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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