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출발하며 남진주를 향해 북동쪽으로 갈 계획이었다. 1억 년 전 백악기 화석 산지인 유수교를 건너 왼쪽 길로 가야 했지만, 길에 취하고 흥에 겨워 그만 직진하고 말았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오르내리막 굽이치는 숲 터널 길을 걸으며 양희은 님의 노래 <배낭여행>을 신이 나서 부르고 걸었다.
한 시간 반쯤 지났을 때 까르르 전투기 소음이 이어졌다. 이 지역에 비행장이라곤 사천비행장밖에 없는데 이상하여 스마트폰을 꺼내 내 위치를 확인했다. 북동이 아니라 남동쪽으로 5km 이상을 내려온 것이다. 어깨에 힘이 빠졌다. 도보여행에서 해서는 안 될 최악의 실수를 또 저지른 것이다. 버스도 없어서 원위치로 갈 수도 없었다. 스마트폰 지도로 길을 살폈다. 이곳에서 3km를 더 가서 4차선 도로를 탈 수밖에 없었다. 원래 예정된 거리보다 훨씬 늘어났다. 그래, 실수는 실수고, 까짓것 가보자. 힘을 내어 걷다가 물과 빵을 사려고 가게에 들러 주인장에게 물었다. 이곳 토박이인 그가 샛길을 알려주는 것이다. 어찌나 고마운지 연신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길을 재촉했다.
볕이 뜨거워 우산을 받쳐 들었다. 건축 중인 산업단지를 지나고 도로공사 중인 벌판을 넘어 마을 길로 접어들었다. 남은 길이 멀어 두 시간 걷고 쉬었다. 보행 속도를 올려서인지 다리가 당겼다. 오솔길도 걷고 사람도 차도 거의 지나지 않는 한적한 시골길을 걸었다. 만약 길을 잃어버리지 않고 원래 길을 걸었다면 이 기쁨을 누리지 못했을 거다. 길을 잃어버려도 괜찮을 때가 있다.
버스를 타려 해도 30분 이상 걸어 나와야 하는 한적한 죽봉마을을 지날 때였다. 수백 년 된 팽나무 정자에 앉아 점심으로 식빵을 먹고 있는데 바로 옆 마을회관에서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우르르 나오신다. 함께 모여 점심을 드시고 나오는 길이다. 시골에서는 나라에서 비용을 대주어 노인들에게 단체로 점심 식사를 제공한다. 노인복지가 좋아졌다. 할머니들이 이상한 차림의 나에게 어디 가냐 묻길래 부산까지 걸어간다니 이해를 못 하시며 버스 타라 한다. 정작 나는 마을회관에 남는 밥 있으니 먹고 가라는 말을 은근히 기대했다. 삼천포로 빠진 대가는 적지 않다. 31km나 걸었다. 내일은 경남 함안 땅으로 들어간다.
<여유가 있으니>
“약간의 돈과 약간의 시간과 약간의 체력이 있으면 도보여행은 가능하다.”
선배 수필가이자 도보 여행가인 이찬웅 선생 말씀이다. 맞는 말이다. 나의 도보여행에 여러 사람이 부러움을 표하지만 난 미안할 따름이다.
◎ 약간의 돈
하루 숙박비 3~4만 원에 식사비로 한 끼 7~8천 원, 물과 파스 등 기타 경비가 들어간다. 20일간 여행 경비로 현지에 오가는 교통비 포함하여 약 100만 원 정도 지출하였다. 아무리 절약해도 적지 않은 금액이다.
◎ 약간의 시간
회사 퇴직 후 자영업 하고 있어도 사업장을 아내에게 말길 수 있는 업종이므로 나는 시간을 낼 수 있었다. 현직에 있으면 불가능하다.
◎ 약간의 체력
10kg이 넘는 배낭을 메고 하루 평균 25km 정도로 계속 걸어야 하므로 체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평소 걷는 걸 좋아한다면 누구나 수백 km 도보여행은 가능하다.
내가 체력이 좋거나 돈이 많아서 장거리 도보여행을 하는 건 아니다. 누구나 마음먹으면 가능하나 앞의 세 가지 조건 중 하나라도 맞지 않으면 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