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 달 동안 즐겁게 본 ‘폭싹 속았수다‘
많은 사람들에게 호평을 받고 있는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를 준영과 같이 봤다. 둘이 모든 에피를 같이 본 드라마는 오랜만이었다. 보통은 같이 시작해도 혼자 정주행 하고 OTT 구독까지 깔끔하게 해지해두는 성실하고 알뜰한 준영이기에^^. 여하튼 드라마를 울고 웃으며 재밌게 봤다. 애순이에게 단단히 호구 잡혀서 애순이가 뭐라뭐라 하면 눈알 위로 굴리며 바보같이 구는 관식이 모습이 꼭 누구 같아서. 관식이 앞에서는 염치도 없고 체면도 없으면서 시장 좌판에서는 양배추 하나 못 팔고 책이나 펴 들고 앉았는 애순이 모습이 꼭 나 같아서.
공감하고 즐거워하며 드라마를 보면서 둘이서 그런 얘기를 했다. 이 드라마는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뭐랄까 용기를 주는 드라마라고. 가족을 위해서 직장에선 조금 희생을 감수하는, 대단한 성공과 보수보다도 일상을 지키기 위해 매일 고뇌하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당신 삶이 가치 있다고 위로를 주는 것 같다고. 이런 말을 하는 준영을 보면서 그동안 치열했을 그의 자기만의 싸움을 살짝 느껴본다. 조직 안에서 일하면서 연봉 얼마 때문에 하기 싫은 일도, 비효율적인 일들도 매일 꿋꿋이 견뎌내는 그의 자괴감과 가족에게 조금의 빈 구석도 느끼지 않게 해 주려고 자기를 수없이 내려놓았던 순간들.
이런 대화를 나누는 동시에 나는 또 한편으로는 이 드라마가 어떤 사람들에게 익숙한 소외감을 느끼게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그들은 행복해서 행복했습니다’,라는 수많은 콘텐츠들과의 동어반복 같은 것을 드라마에서 느껴졌다. 가난하고 어그러진 시대 안에서 그래도 서로 위해주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가족의 가치. 그 가치를 말하기 위해 드라마의 등장인물들은 어딘가 유니콘 같은 존재들이다. 무엇보다 평생, 어떤 순간에도 애순의 행복을 최우선으로 삼으며 모든 고통을 감내하는 관식의 순애보 사랑이 유니콘 같은 것이고, 애순이 받은 친정엄마의 사랑, 할머니의 사랑, 그가 자식에게 베풀어주는 사랑, 성공해서 부모의 고생을 갚아주는 금명도 모두 ‘가족’이라는 렌즈를 통해 보면 완벽 그 자체다.
아마도 드라마를 보면서 어떤 이들은 어떤 상황에도 절대적인 자기편이 되어주는 배우자가 없는 자신의 결핍을 느낄 수도 있고, 왜 나에게는 저런 품을 내어주는 친정 부모님이 없을까 하는 불행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사랑받는 아내, 사랑받는 딸이라는 드라마의 주인공들이 누군가에게는 ‘니 얘긴 아냐’하는 가슴 허전한 기분을 느끼게 하지는 않을까 싶은 것이다. 드라마를 본 후의 잔상이란 것이 사람에게 강력한지 이상한 ‘관식상’이 내게 남아 설거지하고 어깨 아프다는 남편을 새우눈으로 쳐다보게 되는 나 자신이 흠칫 싫어진다.
그런 배우자가, 그런 부모가 얼마나 소중하고 값진가는, 드라마나 영화를 보지 않아도 매일 생활에서 사무치게 느껴지는 것 아닌가. 모두가 아름답다고 말하는 사랑하고 사랑받는 가족, 그 밖에서 선 사람들은 늘 소외감을 느끼는 사회 아닌가. ‘가족’이라는 렌즈로만 나를 보면 너무 무겁고 어딘가에 잘 끼워 맞지 않는 존재 같을 때도 많지 않은가. 수많은 사람들이 울고 웃으며 공감하며 보는 이런 콘텐츠에서 세상 모두가 다 읊어대는 가치 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가치를 말해준다면 하고 바라는 것은 너무 많이 바라는 것일까?
드라마를 보고 나서 이 작품을 만들기까지 얼마나 탁월하고 멋진 사람들이 함께 많은 공을 들였는지 알게 됐다. 배우들의 열연은 말할 것도 없고, 미감 좋은 장면들과 음악, 문학작품 한 권 읽는 것 같은 대사들, 시대를 담아내는 디테일한 연출, 이 모든 것들이 녹아난 수작임에 분명하다. 한달동안 주말마다 네시간씩 몰아보면서 울기도 많이 울었다. 그래서 좀 더 아쉬움이 든다. 드라마의 주제가 사람보다는 철저하게 ‘가족’이고, 그것에 대한 정의가 너무 뚜렷해서. 새로운 상상력이나 가능성을 불러일으키지 못한 그냥 반복적인 감동은 드라마가 다 끝난 뒤에 일상에서 금방 휘발돼버리는 것을 본다.
아무도 소외감을 느끼지 않게 하는 드라마, 아니면 소외된 누군가가 사실은 진짜 주인공인 그런 드라마가 나는 조금 더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