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친코를 읽고
연휴 동안 파친코를 읽었다. 미국에서 시리즈물로 제작되면서 국내에서도 큰 흥행을 했고, 그 이전에 이미 미국에서 크게 주목받은 재미교포가 쓴 재일교포들에 대한 소설이다.
소설과 시리즈물에 대한 열풍 때문인지 당연히 궁금하기도 하면서 마음 한편으로는 괜한 왜곡된 자긍심으로 못마땅한 마음이 있었다. 박경리나 박완서 같은 한국 문학의 대가들이 한국 역사의 풍파를 몸소 겪어가며 그들의 일평생을 통해 써낸 대하소설들을 내가 사랑했기에, 외국에서 사는 이민자가 한국 역사의 아픔을 그린 것이 그들의 작품보다 더 생생하거나 훌륭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 때문이었다.
1권을 읽을 때까지만 해도 이 소설의 역사 고증을 시험하던 나는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풀어가는 작가의 필력과 결코 단순하거나 가볍지 않은 인물들의 내면 묘사로 인해 정신없이 빠져들어 2권까지 읽어 내려갔다. 펄벅의 대지를 떠올리게 하는 흡입력 있는 대작이자 한 가정을 둘러싼 시대의 격변을 생생하게 그려낸 서사시였다. 마지막 챕터를 읽고, 에필로그를 읽으면서 내가 가졌던 편견에 대해 사과하고 싶을 정도로 작가에 대한 존경심이 들었다. 작가로서 다른 이의 삶을 인내를 가지고 경청하는 자세, 그것을 충분히 체화하기까지 섣불리 풀어내지 않는 고집, 그리고 마침내 그것을 마치 자기가 겪은 것처럼 인물들 안에 내밀하게 녹여내는 그 이야기 솜씨를 정말 배우고 싶었다.
이 책은 시대를 살아가는 각 인물이 서로 다른 고뇌와 갈등을 겪으며 인생을 헤쳐가는 그 삶을 세밀하게 그려낸다. 누구나 역사를, 삶을 대하는 방식이 다른데, 그래서 독자들은 다양한 인물들에게 다양한 마음으로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중에서 내게는 특별히 마음에 남는 인물이 있는데, 바로 노아이다. 선자의 큰 아들이자, 장담하건대 모든 독자들이 헉, 하고 멈춰 서게 만들었을 죽음의 주인공. 아마 많은 독자들이 사랑했을, 아니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이 캐릭터야말로 내가 이 소설에 가진 모든 인상을 응축해서 담고 있다. 역경 속에 희망, 고난 속의 숭고함과 아름다움, 그러나 운명을 이겨내지 못한 무력감. 이것이 노아를 통해 이 소설에서 내가 받은 인상이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선자가 죽은 남편 이삭의 묘지를 찾아가는 장면이다. 이 챕터를 읽는 내내 눈물이 줄줄 흘렀는데, 노아 때문이었다. 독자로서 이미 일찌감치 소설 속에서 사라진 인물 노아라는 사람에 대한 아까움과 그리움이 마치 가장 소망이었던 아들을 잃은 선자의 마음이 된 것같이 억누르기 어려웠다. 특히 묘지 관리인이 노아가 예전에 자신에게 디킨스의 책을 주었고, 그를 통해 자신이 갖게 된 희망에 대해 선자에게 감사를 표현할 때 참을 수 없이 감정이 북받쳤다. 모든 고난을 견딜 수 있는 이유이자 소망이었던, 역경뿐인 인생을 환하게 비쳐주는 햇살 같았던, 그리고 여전히 죽음 이후에도 누군가의 삶에 그 빛을 비춰주고 있는 아들을 그리워하는 그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리고 아들과 남편이 꿈꾸었던 그 이상과는 전혀 다른, 하나도 이상적이지 않은 삶을 여전히 홀로 묵묵히 살아내고 있는 선자가 나에게 너무 가슴이 아팠다.
독자라면 누구나 소설 속 인물들에 어느 정도 공감과 감정이입을 하겠지만, 노아는 나와 너무나 가깝게 느껴진다. 누구보다 착한 성품을 가졌지만 속으로는 이상과 현실을 타협하지 못하는 그 융통성 없음이 마음에 와닿았다. 그가 매일을 최선을 다해 살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가진 이상 때문이었다. 아무리 완벽한 연인이 있어도, 그 연인이 자신을 온전한 자신으로 보지 않고 겉모습을 보기에 결국 헤어짐을 택하는 그. 파친코 직원으로 살면서도, 점심시간마다 혼자서 디킨스나 괴테 같은 책을 읽는 그는, 어떤 환경에 있어도 자기 자신다움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노아가 자신의 이상이 꺾였음을 알고, 결국 삶을 더 나아가지 못해 스스로 생을 끊었을 때, 참으로 답답하고 무책임해 보였지만, 그마저도 너무나 이해가 되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삶의 여건이나 환경도, 사실은 소중한 가족도 아닌, 자기 자신의 정체성이었다. 끝까지 지키고자 했던 그 정체성이 결국 좌절되었을 때, 그에게는 더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가 없었던 것이다.
노아가, 그만이 가진 영특함과 아름다움을 펼칠 수 있는 삶에서 살았더라면 어땠을까. 그가 그토록 바랬던 사회의 온전히 속한 구성원으로서, 명문 대학을 무사히 졸업하고, 그가 아버지라 여긴 이처럼 숭고함을 간직한 인물로 살아갔다면 어땠을까. 그러나 누가 무엇을 지향하던, 자신이 태어난 그 자리, 자신의 부모, 그 뿌리를 스스로 선택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돈벌이도 안 되는 문학을 해서 뭐 하냐는 많은 이들의 말처럼, 누군가는 삶에서 아무것도 지향하지 않고 운명에 묵묵히 순응하며 살아가지만, 노아처럼 자기에 대한 감각이 예리한 사람은 순간순간의 결정들이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것과 같은 심각한 것이 되고 만다. 때로는 자기 자신됨을 지키기 위해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저버리기도 한다.
내게 주어진 삶이 있고, 내가 살고 싶은 삶이 있을 때, 그 괴리를 어떻게 좁혀가면서 나다움을 잃지 않을 수 있을까 고민한다. 나는 노아처럼 선택하다가도, 선자처럼 선택하는 사람이다. 그것은 아마 내가 선자처럼 '엄마'이기 때문이 아닐까. '엄마'라는 정체성은 어떤 상황에도 기꺼이 자기 자신을 포기할 수 있게 만드는 강력한 이름이다. 그리고 그 어떤 절망도 이겨내는 소망을 주는 이름이다. 그것은 아마 자식이 주는 기쁨과 희망이 모든 것을 압도하도록, 그래서 어떤 고생에도 눈이 멀어 그 삶을 지속할 힘이 되기 때문이 아닐까. 내가 엄마가 된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영원히 주저앉지 않도록 신이 주신 선물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노아의 죽음이 나에게는 상반되는 감정을 준다. 노아 스스로의 절망과, 선자의 그 모든 것을 감내한 무한한 사랑으로 와닿는 것이다. 나도 때로, 아니 자주 노아처럼 느끼므로, 그리고 나에게도 노아와 같은 빛이 되는 아이들이 있음으로.
내가 아마 인생의 다른 국면에서 이 소설을 읽었더라면 노아 말고 다른 이에게 공감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내게 노아가 말을 걸어온다. 노아의 강함과 연약함이, 내가 나 스스로에게 가장 좋아하는 면과 가장 싫어하는 면을 찌른다. 하지만 노아가 자기 스스로 삶을 이어나가기를 거부했어도, 짧은 만남만으로도 누군가의 삶을 바꾸게 만드는 그의 아름다움이 내게 위로를 준다. 내가 품은 소망이, 내 안에 있는 어떤 열정이, 시간을 넘어 누군가에게도 말을 걸 수 있다면, 파친코 직원이든, 명문대 학생이든 그 겉모습은 중요하지 않다. 그게 오늘을, 현실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살아갈 이유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죽지 않습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썩어지더라도, 오히려 우리의 속사람은 나날이 새로워집니다. (신약성서 고린도후서 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