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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22.12)

나리는 눈을 바라보며

by 영영 Mar 27. 2025

 고요한 새벽입니다. 새하얀 육방형의 결정체들이 온 세상을 뒤덮은 터라 작은 소리들은 그 결정체들이 만든 미로 속에 갇혀버렸나 봅니다. 10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하던 눈을 이제는 매년 보고 있습니다. 창원에서는 눈이라고 하기도 미안한 싸라기눈이라도 날리는 날에는 기어이 밖으로 나가 ‘눈 같은 것’을 만져보고는 했습니다. 육방형의 결정체를 뽐낼 틈도 없이 손에 닿자마자 물이 되는 모습에도 그저 잠시 고체였던 사실에 대한 반가움만으로 쌀쌀한 날씨조차 잊었나 봅니다. 하지만 이제는 눈이 오면 길이 미끄러워지고 지저분하게 여기저기 튀는 흙탕물을 먼저 걱정합니다. 더 이상 반갑지 않은 존재가 된 눈을 생각하며 내가 낭만을 잃은 것인지, 변화에 적응하고 익숙해진 것인지 헷갈립니다.

밤새 하얀 이불을 덮은 길은 아직 아무도 지나가지 않았습니다. 내가 첫 발자취를 남길 수 있다는 설렘과 새하얀 눈에 검은 발자국을 남기는 것에 대한 미안함이 교차합니다. ‘뽀드득 뽀드득’ 발자취를 남기는 것에 대한 축하의 팡파르인지, 더러워지기 시작하는 것에 대한 절규인지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고요한 새벽 거리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조심히 걷는 눈 소리가 적막을 깨웁니다. 늘 걷던 길이지만 내가 첫 발자국을 만든다는 알 수 없는 책임감 때문에 한걸음 한걸음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습니다. 그렇게 겨울이 왔고 한 해가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12월 한 달을 잘 보낸다면 마치 1년을 잘 보낸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신이 주신 선물이라는 망각을 이렇게 유용하게 활용합니다. 혹은 ‘꿈보다 해몽’이라는 속담을 차용하여 ‘유종의 미’를 거두려고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지금의 마음을 매달 한 번씩만 되새기면 참 좋을 것 같다고 너스레를 떨며 12월 한 달만큼은 잘 보내려고 노력합니다. 동시에 한 해를 되돌아봅니다. 올해를 잘 보내주고 내년을 새로이 맞이한다는 마음으로.

 사실 올 한 해는 너무 힘든 한 해였습니다. 준비하던 시험에서 보기 좋게 고배를 마셨습니다. 열아홉의 겨울처럼 스물일곱의 봄에도 고민하고 또 고민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봄바람 휘날리는 날 둘이 걷자며 사랑을 노래하는 봄이라는 노래 가사와는 달리 고독한 고뇌의 시기가 있었습니다. 다행히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힘을 길러서인지 금방 목표를 설정하고 그에 알맞은 방향 키를 잡고서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새로이 방향을 잡았지만 녹록지만은 않았습니다. 분기 당 하나씩의 실패를 경험하라는 깊은 뜻이 있었나 봅니다. 매 분기 하나씩 자격증 시험을 낙방합니다. 마지막을 아름답게 장식하겠다는 마음으로 준비한 시험마저 불합격 이러는 세 글자로 저를 찾아왔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하나같이 다 안될 수 있는지 너털웃음만 납니다. 제 능력과 노력의 부족이었다고 할지언정 실패에도 ‘과유불급’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지 따지고 싶은 마음입니다. 누구를 탓할 수도 없고 탓할 필요도 없지만 원인을 한번 생각해 봅니다. 작년의 제가 다소 게으르고 오만했던 것 같습니다. 그 게으름과 오만함이 1년의 시간 동안 나눠서 저에게 쓴맛으로 되돌아온 것인가 생각합니다. 아주 조금은 겁이 납니다. 2021년의 게으름이 2022년의 실패로 돌아왔다면 2022년의 몸부림은 2023년에 빛을 볼 수 있을지 걱정됩니다.

 

 하루를 보내고 다시 집으로 돌아갑니다. 차도 다니고 사람도 다닌 거리는 더 이상 새벽의 그 새하얀 거리가 아닙니다. 빗으로 쓴 자국부터 차바퀴가 굴러간 자국, 염화칼륨이 뿌려진 자국까지 눈길도 나름 고된 하루를 보낸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더 이상 ‘뽀도독’ 소리도 나지 않습니다. 제법 정리가 잘 된 길은 다시금 편하게 걸을 수 있습니다.

 다음 날 새벽, 밖을 나가기 위해 문을 열자 밤새 또 하얀 세상으로 돌아왔습니다. 다시 발자취를 남겨야 합니다. 어제의 내가 만들었던 발자국들은 모두 사라졌고 새롭게 내린 눈들로 하얗게 뒤덮인 길을 걷습니다. 어제의 발자국보다 오늘 더 괜찮은 발자국을 남길 수 있을지 궁금해집니다. 어제와 같은 장소를 향하는 발걸음이지만 어제와는 다른 발자국으로 저만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갑니다. 연속적인 시간의 흐름 안에서 불연속적인 발걸음을 남겨봅니다. 발걸음은 불연속적일지언정 발걸음을 만드는 ‘나’는 어제도 ‘나’였고 오늘도 ‘나’입니다. 어제 체육관으로 향하는 길에 만든 나만의 발자취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오늘은 더 마음에 드는 발자취를 남기면 됩니다. 어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오늘의 나도 마음에 들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으니까요. 오늘도 조금 아쉬운 발자취라면 내일 또 새롭게 하얗게 포장된 도로에 더 마음에 드는 발자취를 남길 생각입니다. 내가 나로서 존재하는 한 새로운 발자국은 언제든 남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번 겨울 눈이 퍽 많이 와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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