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의 배신

비건 친구 생활백서 EP12 | 비건 와인이 따로 있더라

by 채루에 Ruhe

그렇다. 감자칩에 이어, 와인도 배신이다. 포도만 들어간 와인도 비건이 아닌 게 대부분이다. 이건 감자칩의 배신​을 알고 나서도 한참 뒤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다. 와인이 문화에 가깝기 때문일까, 비교적 저렴해서일까, 독일에서 저녁에 와인 한잔 곁들이는 건 흔한 일이고, 초대받은 집에 와인을 가져가는 것 역시 마찬가지로 흔한 일이다. 그래서 비나의 초대에도 와인을 한 병들고 갔는데, 비나가 고맙다고 냉장고에 넣어 칠링 해두기에 별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저녁을 먹으며 와인을 한 병 딸까? 하는 말이 나오고 칠링이 된 와인들 중에 뭘 먼저 딸까 얘기를 하며 비나가 집에 있는 와인들을 소개하며, “이건 내 피앙세가 선물로 받아온 좋은 와인이고, 심지어 비건이야”라고 하는 것이다. 응? 하는 말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와인이란 모름지기 포도로만 만드는 게 아니던가. 물론 종종 꿀이 들어가거나 특이한 와인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 일반적으로 말이다. 그러니까, 와인 자체에 동물성 제품이 들어간다기보다는 동물성 제품을 일종의 정제과정에서 사용하는데 그것 역시 동물성제품의 소비이기 때문에, 그리고 어쨌든 동물성 제품이 들어갔다 나온 거이니 비건이 아니라고 본다는 거다. 그래서 사실 대부분의 전통적인 방식으로 만들어지는 와인은 비건이 아니다.

신중하게 와인을 고르던 우리. 먹는 것에 진지한 우리가 좋다.


너무 신기해 집에 와서 좀 더 찾아봤다. 자세히 보니 와인을 만드는 과정에서 불순물들을 1차로 필터링하고도 한 차례 더 해야 하는 잔여물들이 남아있는데, 이 잔여물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동물성 단백질인 카제인을 주로 사용하는데, 이 카제인은 주로 달걀흰자나 우유에서 나오고 심지어는 생선 부레에서 나온 젤라틴을 활용하기도 한다는 것. 사실 생각해 보면 세상엔 수많은 종류의 와인이 있고, 더 좋은 와인을 탐구하는 이들이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얼마나 많은 과정을 거쳐 테이블 위, 빛나는 와인잔에 비로소 따라지겠는가. 그런 복잡한 제조과정이 아주 오랜 역사의 시간을 거슬러 인간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거기에 동물성 재료가 없다면 그게 더 부자연스러웠을 것 같다.

친구들이랑, 동료들이랑 일상적으로 마시는 와인들이 다 비건이 아니었다니 놀랄 노자다.

다행스럽게도 요즘 내츄럴 와인이 좀 더 유행세를 타기 시작했는데, 말 그대로 인위적인 재배•양조과정을 최소화해서 만든 와인을 내츄럴 와인이라고 한다. 식초향도 강하고 침전물이 있기도 해서 호불호가 강하지만, 지속가능성에 대한 선호와 또 이 특유의 톡 쏘는 시큼함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다. 무튼, 이 내츄럴 와인은 당연히도 비건이기에, 비건들도 소비할 수 있는 무언가가 트렌드를 탔다는 점이 무척 반가웠다. 유행하는 걸 친구와 함께할 수 없을 때 아쉬움을 비나와 어울리며 느꼈기 때문이다. 물론 내츄럴 와인이 우리의 입에 맞을지는 확인해 볼 일이다만은.


무튼 비나에게 그럼 내가 가져온 와인은 비건이 아니라 마시지 못하냐고 물으니 손을 저으며, 그렇게까지 하기엔 너무 복잡하다고, 이 논비건 중심의 세상을 살며 최대한 노력하지만 와인은 비나도 노력하면서도 절대 피하고 살기는 너무 어렵다도 생각해 이럴 땐 같이 마신다고 한다. 다행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아쉬운 마음이 조금 들었다. 비나가 절대적이고 완벽주의적인 비건을 추구하나 사실은 유연성이 있다는 점은 친구인 나에게 사실 편의한 점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무언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그때는 그게 무슨 마음인지 몰랐지만, 이제 돌이켜보니 나도 모르게 완벽한 사람으로 비나를 보고 기대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미 자기 삶의 불편함을 매일같이, 여러모로 감수하고 있는 비나가, 내 머릿속에선 완벽한 사람으로 자리를 잡은 모양이다. 참 사람은 치사하고도 이중적이다. 나는 채식도 온전히 못 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니.


진짜로 요렇게 비건 표시가 박힌 와인이 따로 있다.



와인마저도 비건이 아닌 게 일종의 디폴트라니.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다. 따로 시켜 먹기 쉬운 음식에 비해 와인은 보틀로 자주 나눠마신다는 점에서 더 어려울 거 같다. 생산과정에서 발생하는 동물의 희생까지 신경 쓴다는 마음이 고결하게 느껴지는 와중에 현대 문명의 기특한 발전이 이런 희생의 최소화가 되었으면 하는 고양이맘의 마음이었다. 맛있는 와인을 포기하지 않고도 동물을 희생시키지도 않을 그런 날을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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