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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시린 Nov 12. 2024

복어잡이 배의 비밀

CEO를 위한 주역


배 좀 타본 후배에게 재미난 얘기를 들었다.


복어잡이 배는 먼바다로 나가는 동안, 2만 개의 낚싯바늘을 뿌린다. 그동안 낚싯바늘이 달린 그물망은 펼쳐지고 거두어지기를 반복한다. 하루면 그 직선거리가 40㎞를 넘다. 그렇게 뿌려 놓은 2만 개의 낚싯바늘 중 복어가 걸리는 바늘의 수는 10퍼센트가 채 안 된다.

그 정도면 해볼 만한 거 아니냐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망망한 바다 위 복어잡이의 포인트는 계절마다 달라진다. 그나마도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발견다. 그런 노력이 없다면 2만 개의 낚싯바늘 대부분이 허탕을 칠 거다.


망망대해를 헤치는 복어잡이 배 한 척을 머릿속에 그리며 생각해 보자. 미래는 과연 예측하는 것일까. 올 겨울에 복어가 얼마나 잡힐지 현란한 계산과 수식으로 점칠 수 있을까.

미래는 우리가 만들어 낼 뿐이다.

낚싯바늘을 열심히 뿌리면 복어가, 다름 아닌 미래가 낚인다.


**

미래는 들이닥친다.

벼락처럼, 정전처럼 우리 곁에 찾아와 있다. 

그러니 내일 또는 내년, 무일이 있을지 지금 예측해야 소용없다.

그럼, 손 놓고, 넋 놓은 채 미래의 기습을 기다릴까.

아니, 미래는 우리가 만든다.


모든 기업이 미래를 ‘계산’하려 안달이다. ‘계산’이란 표현을 쓴 건, 기업들의 ‘미래 예측’이 다이소에서 이천 원 주고 산 플라스틱 계산기의 일처럼 단순해서다. 하지만 시장조사→수요예측으로 이어지는 그들의 분석은, 몇 가지 수식과 그래프를 빼고 나면 초등학생들 ‘산수’다. 대도시의 부산한 사무실, 그리고 매너리즘에 빠진 기계적  작업들……. 오죽하면 걸출한 경영자들 사이에 '시장조사 무시론'이 시절을 타지 않고 떴다 질까.

그런데 동양의 고전 주역도 그런 암시를 건넨다.

미래는 예측하는 게 아니라고, 생성하는 거라고.

그런데 어떻게?


**

몇 년 전, TV에서 드라마로 만들어진 《이태원 클라쓰》를 몰아보며 열광했다.

“내 가치를 네가 정하지 마!”

바닥에서 출발해, 불가능할 것 같던 복수를 이뤄내는 박새로이(박서준)의 무심한 표정이 좋았다. 자신의 가치는 자신이 직접 규정한다는 자신감이 멋졌다. 그런데 2024년 가을, 《이태원 클라쓰》가 미국에서도 흥행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한국에선 웹툰이었고, 드라마였다. 머나먼 미국에서 《이태원 클라쓰》는 종이책으로 부활했다.

콘텐츠의 활로를 당신 맘대로 정하지 마!  

종이책의 부활이라는 '미래'를 예측할 수 있었을까.


사전 정지 작업이 있었다. 판권을 가진 카카오는 한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미국에서도, 웹툰으로, 넷플릭스 드라마로 《이태원 클라쓰》를 뿌려댔다. 그렇게 사전에 형성된 팬덤이 ‘죽은 줄만 알았던’ 종이 만화책의 흥행으로 이어졌다. 웹툰과 드라마란 미끼가 예상 밖의 ‘미래’를 만들어 냈다.

종이책의 흥행은 예측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뿌려 놓으면, 종이책의 흥행은 들이닥친다.


《이태원 클라쓰》뿐 아니다. 로코(로맨스 코미디) 《사내 맞선》의 종이책 버전도 미국에서 흥행했다. 《사내 맞선》은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웹소설, 웹툰, 드라마로 콘텐츠 소비자들과의 접촉을 늘렸다. 종이책의 흥행은 그다음이다. 둘 다 2024년 기준으로 미국에서 한 달에 각각 1만 부씩은 팔렸다.

뿌려 놓으면, 미래는 거두어진다.


**

주역은 384개의 메시지 모음이다. 그 메시지들은 무질서하고 혼란스럽다. 2500년 전쯤 전쟁을, 혁명을 앞두고 얻은 ‘하늘의 뜻’들은, 처음엔 거북의 등과 동물의 뼈에 새겨졌다. 수천 개, 수만 개였을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들 대부분은 들판에 버려졌다. 그걸 편집광과도 같이 집요한 편집자들이 수습해 64개의 괘로 분류했다. 그렇게 힘겹게 살아남아 무질서하게 흩어진 ‘자료’들이 합종연횡하며 만들어 낸 ‘의미’들의 총합이 주역이다. 주역에 있어서 ‘의미’는, 그러니까 옛날 ‘자료’들의 미래다. 주역은 미래가 생성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산하에 흩뿌려진 메시지들(과거)이 의미(미래)를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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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만들어 낸 것 중 밤하늘의 별자리만큼 신비한 게 없다. 까만 하늘에 무질서하게 흩어진 별들이 어느 순간 작은 곰과 큰 곰으로, 신화 속 오리온과 헤라클레스로, 갖가지 사건의 순간들로 태어난다. 별자리도, 주역의 괘도 언젠가 흩뿌려진 것들로부터 만들어지는, 미래의 결정체들이다.

한물간 줄 알았던 종이책의 기습적 부활도 그랬다.

어느 겨울, 수십 킬로미터를 유영하며 고군분투하던 배 위로 끌어올려진 복어들이 그랬다.


오늘, 내일을 만들어 낼 재료들을 뿌려대는 게 우리의 할 일이다.

마당 쓸고, 꽃잎 떨어지길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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