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담배를 문 카뮈가 웃었다

주역 에세이

by 고시린

도서관에서 실존주의에 관한 책을 빌렸다. 사는 게 여러 날 괴로워 그랬는지 자연스레 손이 갔다. 오해일지 모르지만, 고뇌와 우울을 대변해 주는 철학 사조는 실존주의밖에 없는 것 같단 생각을 했다. 도서관 서가에 기댄 채 책을 펼치니, 불안, 부조리, 죽음 등등 우리 일상에 파고든 언어들이 책 속에 많다.

다행이다.


젊은 날을 떠올려 보면,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사르트르의 말은,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마르크스의 말만큼 압도적이었다.

그런데 책이 많이 어럽다.

몇 페이지를 못 넘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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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덮었다.


언젠가 광고에서 보았던 사진 한 장을 떠올렸다. 코트 깃을 세우고 반쯤 피운 담배를 입술 한쪽으로 문 채 맑게 웃는 카뮈의 얼굴이다. 조용한 열정이 배어난 젊은 카뮈의 얼굴에서, 20세기의 실존주의가 완성된다.

거리에서 웃고 있는 카뮈의 모습이, 그의 간명한 실존주의 에세이 《시지프의 신화》 집필 전의 모습인지 후의 모습인진 모르겠다. 강렬한 이 문제적 에세이에서 카뮈는, 우주의 무관심, 생의 부조리를 온몸으로 감당하며 신과 맞서는 시지프를 우리 시대의 영웅으로 격상시킨다.


젊은 시절 《시지프의 신화》를 읽으며 짧은 발문과 결론에 열광했던 기억이 난다. 고대의 문헌에서 인용한 발문과 카뮈 본인의 끝 문장도, 당시의 열광만큼 생생하게 기억한다.

.. 나의 영혼이여,

불멸의 생을 열망하지 말고

가능의 영역을 탕진하라.


.. 행복한 시지프를 상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젊은 카뮈의 미소는 신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던 시지프의 자신감이다. 다시 굴러 떨어질 줄 알면서도, 산 정상까지 바위를 밀어 올리는 시지프의 열정이다.

누군가, 웃고 있는 젊은 카뮈의 사진에서 시작하는 실존주의 에세이를 하나 써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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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도착해 다시 책을 펼쳤다. 입술을 깨물어가며 난해한 문장들을 읽어보니, 실존주의가 무언지 느낌은 온다. 조금 어수선하지만 그 느낌을 말로 풀면…….


.. 우리는 뜻하지 않게 세상에 던져졌다. 그런 세상이 우리에게 친절할 리 없다. 부조리하게 느껴지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그건 우리 생각일지 모른다. 세상은 우리에게 무관심할 뿐이다. 무관심이 만들어낸 무의미 속에서 의미를 만들어 내는 건 우리 자신이다. 던져진 세상을 향해, 이번엔 우리가 우리 자신을 내던져야 한다. 그게 바로 실존주의자의 일, 모든 것에 앞서는 행위다.

그러니까 실존은, 던져진 세상에서 좌절하지 않고, 그 세상에 우리를 다시 내던지는 ‘결단’이다.

우리는 그렇게 순간순간, '나'를 기획하고 결단한다.

실존은 그렇게 얻어진다.


카뮈의 미소는 그렇게 세상에 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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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유럽에만 '실존적 결단'이 있었던 건 아니다. 시공으로 정반대 쪽에 자리한 2000년 전 동아시아의 고대인들에게도 그런 결단이 있었다. 그들의 '실존적 결단'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주역》에서 ‘결단’은 점을 치는 행위로 나타난다. 주역을 즐기는 사람들은 64괘의 변화를 관조하며 일상을 보낸다. 삶의 상황을 상징하는 형상들과 그 속에 담긴 메시지들을 바라보며 시절을 보낸다. 또는 삶 자체의 형상과 그 속에 담긴 메시지를 관조해도 무방하다. 주역은 삶에서 한치도 비껴 나지 못하니까.


그러다 상황이 급변하는 때가 온다. 그때 그들은 ‘우주의 흐름’을 끊고 괘 하나를 뽑아 든다. 그게 바로 주역에서 점을 치는 행위다. 그리고 그 '결단'은 신성했다.

주역엔 이런 메시지가 등장한다.


.. 한 번 물으면 알려준다. 두 번, 세 번 물으면 모독이다. 알려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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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단’은 우리 자신을 송두리째 우주에 내던지는 실존주의적 행위다. 한 번의 결단에 온 우주가 흔들린다.


결단했으면 물러서지 말아야 한다.

두 번, 세 번 묻지 말아야 한다.


그때, 지친 시지프가 고개를 치켜들고, 담배를 문 카뮈가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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