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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시린 Nov 14. 2024

저녁과 주말의 고독

CEO를 위한 주역


수많은 아포리즘이 주역에 등장한다. 그중 하나, 나를 사로잡은 문장은 주어와 목적어를 날린 채 간결하다. 간결해서 헐겁고, 헐거워서 자유롭다.


.. 스칠 뿐 만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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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에선 사람을 뽑을 때, ‘평판 조회’를 한다. 내가 얘기하는 ‘나’와, 남들이 말하는 ‘나’는 다르다. 그러니 당사자 인터뷰가 끝난 후엔, ‘남들’ 몇 명을 수배해 그에 관한 얘기를 듣는다.

   

임원급으로 올라갈수록 그의 업무능력 외에 네트워킹에 관해 묻는 경우가 많다. 얼마나 많은 사람을 알고 지내느냔 거다. 사업을 진척시킬 수 있는 협의와 협업이 가능한 사람이 주위에 상시적으로 존재하느냔 얘기다. 우연한 기회에 누군가의 평판 조회에 관한 후문을 전해 들었는데, 네트워킹에 관한 질문이 빠지지 않았단 얘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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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직을 제외하면, 기업에 다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게 일이다. CEO들은 오죽하겠나. 그들의 캘린더는 하루에도 두세 개의 약속으로 빼곡하다. 점심, 저녁, 티타임에 조찬 모임까지 그들은 종일, 연중 사람들에 시달린다.      


사실 연구직이라 해도 네트워킹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경쟁사의 연구 현황을 살펴야 하고, 시장 동향도 알아야 한다. 외골수가 통하는 직장은 이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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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대외적인 업무를 하는 기업 임원 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12월과 1월, 2월 석 달간은 외부 약속을 전폐한다고 했다. 저녁 술 약속을 잡지 않고, 주말 골프 약속을 봄으로 미룬다는 얘기였다.     


저녁과 주말의 고독을 그는 원했고 실현하는 중이었다. 그에게 “칩거의 석 달 동안 특별한 변화가 일어나느냐”고 물었다.

재충전의 기회 정도?


그는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고 했다. "루틴하게 진행하던 업무의 본질을 새롭게 규정하고, 우선순위를 재배열할 수 있게 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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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에서 흔히들 쓰는 금언 중에 “물은 배를 띄우지만, 그 배를 뒤엎기도 한다”는 말이 있다. 민심의 엄중함을 강조할 때 동원하는, 어느 정도 상투적인 레토릭이다.   

   

기업마다 직원들에게 요구하는 네트워킹에 관해서도 같은 얘기를 할 수 있겠다.


..사람은 비즈니스를 가능하게 하지만, 그 비즈니스의 주체를 지치게 다.     


필요할 땐, '그 사람들’을 ‘스칠 뿐 만나지 않겠다’는 의지가 필요하다. ‘불우과지(不遇過之)’는 주역의 뇌산소과(雷山小過) 괘에 등장하는 '네트워킹 일시 정지'의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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