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지나고 가을. 이동기 새들이 잠시 통과하며 여행하는 계절입니다. 여름철새나 겨울철새처럼 한 계절을 나고 떠나는 새들도 있지만, 봄가을에는 나라 간 이동을 하는 새가 잠시 쉬었다가 가기도 해요.
그렇게 잠시 한국을 들르는 새를 나그네새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고속도로에서 휴게소를 들르듯, 나그네새는 안전하게 목적지로 가기 위해 잠시 날개를 접고 휴식을 가집니다. 날씨가 안 좋거나 바람의 방향이 적당하지 않은 날이 그런 날이죠. 그래서 봄가을이 시작하고 끝날 때까지 바람의 방향이나 기상 예보를 보다가 이쯤 쉬어가겠구나 계산을 하고 잠시 들르는 나그네새를 기다려봅니다. 조건은 맞더라도 그날 그 순간 새가 찾아와 줘야 만날 수 있어요.
잠시 쉬어가기에 적당한 가지와 물이 있는 산. 단풍이 예쁘게 들어서 사람들이 왔다 갔다 왕래가 많아 조금 걱정도 되었지만, 마땅히 더 찾아갈 곳이 없기에 풀숲에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노랑딱새는 내향적이라 사람 많은 곳에서는 좀 숨는 편인 것 같아서요. 벌써 약속 파투난 기분이 들어 조금 울적했습니다.
이럴 땐 걱정 말라는 듯이 붙임성 좋고 호기심 많은 진박새가 나타납니다. 평소 깊은 산에서 시원하게 여름을 보내고 겨울이 되면 하산해 주는 덕분에 얼굴 보고 가요.
모히칸 같은 머리깃이 솟아오르고 내려가는 걸 즐겁게 구경해 보고, 다시 하염없이 새를 기다리는 시간.
이 장소의 유일한 단점, 구릿하게 올라오는 은행 냄새가 이따금 부는 바람에 코를 스치고 가지만 뭐 어때. 해도 좋고 은행나무 아래에서 금빛 그림자 살랑이는 오후입니다.
그러길 몇 시간, 아무도 지나지 않아 조용해진 찰나에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울음소리도 없이 노랑딱새 한 마리가 내려왔습니다. 너무나 고대하던 가을 이동기 나그네새. 잘 익은 망고와 호박 그 어딘가쯤 되는 깃털이 무척 예뻐요.
전에는 흔했던 나그네새라는데 환경도 바뀌고 먹이를 구하기가 어려운지 점점 개체수가 줄고 있는 새. 그래서 그런지 참 열심히 찾아다녀야 매년 1번 겨우 보고, 아 올해도 다행히 만났다 하고 안심할 수 있습니다.
▲빨간색이 번식지, 파란색이 월동지입니다.
이 노랑딱새도 다른 동료들처럼 바이칼호 주변, 아무르, 사할린에서 여름을 보내고 남쪽으로 이동하는 중이었을 텐데요.
양측 날개를 까딱거리며 주변을 탐색하더니 숨어있던 수상한 탐조인을 찾아내는 녀석, 낌새가 금방이라도 날아갈듯합니다.
'안돼 가지 마, 나는 너를 만나려고 가을을 기다렸어...'
심기가 불편해지면 미련 없이 훌쩍 날아가서 다시 안 오기 때문에 최대한 무해하게 보이도록 숨소리도 작게, 저려서 감각 없어진 다리도 움직이지 않으니
다행히 바위로 내려왔습니다.
아직 탐조인이 미심쩍은지 자꾸 고개를 꺾으며 쳐다봅니다. 아슬아슬한 눈 맞춤 몇 번 주고받다가 당장은 경계보다 물이 더 고팠는지 꽁지깃까지 활짝 펼치고 개운하게 씻고 갑니다.
딱새 이름 붙은 애들은 어쩜 이렇게나 예쁠까요. 이 작은 새가 잠들어 있던 솔딱새과 덕후의 마음에 불을 지릅니다. 이동기에는 무리를 지어서 다니니 다른 새들도 있겠거니 1시간 정도 기다려 보았지만, 아쉽게도 더 오지는 않았어요.
그래도 오랜만의 탐조, 보기를 염원했던 가을 나그네새를 만나니 정말 기분 좋습니다.
겨울을 나려고 내려온 되새도 머리 위로 날아갑니다. 올해는 작년보다 훨씬 빨리 만났네요. 겨울철새도 보이는 걸 보니 이제는 정말 추워질 일만 남았나 봐요.
탐조 장비를 정리하고 자리를 옮기며 평소 조류 관찰 기록을 남기던 네이처링에 들어가 되새 소식을 올렸습니다. 문뜩 다른 되새들의 근황도 궁금해져 검색창에 되새를 쳐보니 저와 마찬가지로 새들을 기다려온 사람들이 되새를 만나고 기뻐하고 있어요.
겨울이 날아들었군요. 새들의 날개를 타고.
다음에는 어떤 새를 기다려볼까. 흰꼬리수리, 큰고니, 그리고 가창오리 등등. 기다려볼 새는 다시 또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여갑니다. 이만 탐조 기록 총총 마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