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식으로 표현할 수 없는 가치
출근길 지하철 안, 흔들리는 차체에 몸을 맡긴 채 맞은편 좌석을 바라본다. 아침 7시 50분 열차에 오른 사람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지쳐 보인다. 고개를 숙인 채 스마트폰 화면을 응시하는 이, 눈을 감고 잠시나마 휴식을 취하는 이, 창밖의 어둠을 멍하니 바라보는 이. 각자의 방식으로 하루의 시작을 준비하는 모습들이 묘하게 닮아있다. 역과 역 사이의 정확한 시간 간격, 예측 가능한 정차와 출발, 이 모든 것이 정교한 수식처럼 작동한다. 도시의 아침은 이렇게 계산된 리듬 속에서 깨어난다.
차창에 비친 내 얼굴을 보며 문득 생각한다. 언제부터 이렇게 예측 가능한 궤도를 따라 움직이게 되었을까. 아침 7시 알람, 7시 40분 지하철, 8시 30분 사무실 도착, 12시 점심, 6시 퇴근. 하루가 몇 개의 숫자로 압축되고, 삶이 시간표로 환원되는 순간들. 우리는 모두 보이지 않는 방정식의 변수가 되어, 정해진 범위 안에서만 진동하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성공한 삶 = 좋은 학교 + 안정된 직장 + 화목한 가정
누군가 칠판에 적어놓은 듯한 이 공식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며 살아왔다. 각 항목을 채우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고, 그 과정에서 정작 중요한 것들을 놓쳤다. 그러나 삶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들은 종종 이 방정식의 바깥에서, 예상치 못한 오차와 편차 속에서 발견되곤 했다.
지하철이 도시의 곳곳을 지나치는 순간, 차창 밖으로 도시의 스카이라인이 펼쳐진다. 아직 하루의 시작이 결정되지 않은 순간, 마치 어둠이 걷히지 않은 새벽, 여기저기 켜진 불빛들이 마치 거대한 회로판의 LED처럼 명멸한다. 이 복잡한 도시 시스템 속에서 우리는 전류처럼 흐르고, 신호처럼 전달되며, 데이터처럼 처리된다. 모든 것이 수치화되고 계량화되는 시대, 우리의 감정마저도 간단한 기호로 축약하려 한다.
차가운 금속 손잡이를 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체온의 대비가 선명하다. 이 촉감, 이 온도의 차이를 어떤 방정식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공기의 서늘함이 폐 깊숙이 스며드는 감각, 졸음과 각성 사이에서 흔들리는 의식의 파동, 하루를 시작하는 막연한 불안과 기대가 뒤섞인 복잡한 감정의 스펙트럼. 이 모든 것을 단순한 수식으로 환원하려는 시도는 마치 바다를 찻잔에 담으려는 것과 같다.
사무실에 도착해 모니터를 켜고 오늘의 일정을 확인한다. 스프레드시트에 정리된 숫자들, 그래프로 시각화된 성과 지표들, 퍼센티지로 표현된 달성률. 모든 것이 명확하고 객관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숫자들이 담아내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프로젝트를 완성하기 위해 보낸 불면의 밤들, 실패 앞에서 느낀 좌절감, 작은 성취가 가져다준 벅찬 기쁨. 감정의 진폭은 어떤 그래프로도 그려낼 수 없다.
인간의 감정은 결코 선형적이지 않다. 때로는 모순적이고, 때로는 예측 불가능하며, 스스로도 설명할 수 없는 심연을 품고 있다. 같은 상황에서도 어제와 오늘의 반응이 다르고, 같은 사람을 향한 마음이 순간순간 변화한다. 사랑과 미움이 종이 한 장 차이로 전환되고, 기쁨이 슬픔으로, 확신이 의심으로 순식간에 뒤바뀌는 이 비선형성. 우리의 감정은 수학자의 언어가 아닌 시인의 언어로만 포착될 수 있는지도 모른다.
점심시간, 회사 옥상에 올라가 도시를 내려다본다. 발아래 펼쳐진 거리를 빠르게 오가는 사람들의 움직임이 마치 브라운 운동을 하는 입자들처럼 보인다. 무작위적으로 보이는 그들의 궤적도 사실은 각자의 목적지를 향한 계산된 경로다. 이 거대한 도시라는 방정식 속에서 우리는 모두 해를 구하기 위해 움직이는 미지수들이다.
그런데 문득 깨닫는다. 감정의 흐름에도 나름의 패턴이 있다는 것을. 마치 프랙털 구조처럼, 부분이 전체와 닮은 형태를 무한히 반복하듯, 우리의 감정도 어떤 자기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어린 시절 느꼈던 상실감의 패턴이 성인이 되어서도 비슷하게 재현되고, 첫 실패의 좌절감이 이후의 도전에서도 유사한 형태로 나타난다. 나뭇가지가 뻗어나가는 모습이나 해안선의 굴곡처럼, 우리 내면의 지형도 역시 복잡하면서도 어딘가 질서 정연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만유인력의 법칙을 떠올린다. F = G(m₁m₂/r²). 두 물체 사이의 인력은 질량의 곱에 비례하고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간단명료한 공식. 인간관계도 이와 닮아있다. 서로를 향한 마음의 무게가 클수록 강한 끌림이 생기고, 물리적이든 정서적이든 거리가 멀어질수록 그 연결은 약해진다.
하지만 여기에는 뉴턴이 설명하지 못한 무언가가 있다. 바다 건너 있는 오랜 친구의 안부를 묻는 한 통의 메시지가 가져다주는 따스함. 수십 년의 시간을 건너뛰어 여전히 선명한 첫사랑의 기억. 물리적 거리와 시간의 간극을 초월하는 마음의 중력장. 이것은 어떤 공식으로도 계산할 수 없는 감정의 물리학이다.
오후의 회의실, 프로젝터 화면에 띄워진 수익 곡선을 바라본다. 상승과 하락을 반복하는 그래프의 궤적이 묘하게 인생의 굴곡과 닮아있다. 하지만 차트가 보여주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하락 국면에서 느꼈던 절망감, 반등의 순간에 찾아온 안도감, 정상에 도달했을 때의 공허함. 숫자는 결과만을 보여줄 뿐, 과정의 감정적 질감은 담아내지 못한다.
우리는 사랑마저도 공식화하려 한다. L = G + R. 주는 것과 받는 것의 균형. 하지만 진정한 사랑의 순간들을 떠올려보면 이 등식은 무너진다. 깊은 밤 홀로 앉아 누군가의 안녕을 빌던 순간, 아무 대가 없이 베푼 작은 친절, 침묵 속에서 나눈 깊은 이해. 이런 순간들의 가치를 측정한다면, 아마도 이런 공식이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
사랑의 가치(V) = 주는 것(G) ÷ 자아(S) [단, S→0]
자아가 0에 가까워질수록, 즉 자신을 비울수록 사랑의 가치는 무한대로 향한다. 역설적이지만 가장 많이 주는 순간이 가장 많이 받는 순간이 되는 이 신비. 현대사회는 자아를 키우라고, 더 많이 챙기라고 가르치지만, 진정한 충만함은 오히려 비움에서 온다는 진리를 우리는 가끔 잊는다.
퇴근 시간, 다시 지하철에 몸을 싣는다. 아침과는 다른 피로감이 전신을 감싼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도시의 불빛들을 보며 생각한다. 우리의 성장 과정도 하나의 방정식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어쩌면 이렇게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성장 = 실패 × 시간 × 노력
그렇다면 실패가 없는 삶에서는 성장도 없다는 뜻일까. 미분방정식이 순간의 변화율로 전체의 움직임을 설명하듯, 우리의 변화도 매 순간의 미세한 선택들이 누적되어 이루어진다. 오늘 읽은 책의 한 구절, 동료와 나눈 짧은 대화, 실수 후의 반성. 이 모든 것들이 dx/dt라는 미분값으로 우리를 조금씩 변화시킨다.
밤늦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 문득 하늘을 올려다본다. 도시의 불빛에 가려 별은 거의 보이지 않지만, 그 너머 우주의 광대함을 상상한다. 인생의 궤적은 카오스 이론의 나비효과를 닮았다. 브라질의 나비 날갯짓이 텍사스의 토네이도를 일으킬 수 있다는 그 이론처럼, 우리 삶에서도 작은 선택 하나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인생을 바꾸기도 한다.
10년 전 우연히 선택한 한 권의 책이 직업을 바꾸게 했고, 길에서 마주친 낯선 이의 한마디가 인생관을 뒤흔들었으며, 순간의 결정이 평생의 방향을 결정했다. 초기 조건의 미세한 변화가 전체 시스템에 거대한 차이를 만들어내는 이 예측 불가능성. 그래서 삶은 미리 풀 수 없는 방정식, 살아가면서 실시간으로 계산해야 하는 동적 시스템이 된다.
늦은 밤, 책상 앞에 앉아 오늘 하루를 돌아본다. 스프레드시트에 정리된 업무 목록은 완료되었지만, 정작 오늘의 의미는 그 체크박스 너머에 있다. 프로젝트 마감을 앞두고 느낀 압박감 속에서 발견한 작은 돌파구, 점심시간 우연히 들은 음악이 불러일으킨 묘한 그리움, 퇴근길 지하철에서 마주친 타인의 지친 표정에서 본 나 자신의 모습.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가 떠오른다. 충분히 복잡한 체계 내에서는 그 체계 자체로는 증명할 수도, 반증할 수도 없는 명제가 반드시 존재한다는 그 정리.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삶이라는 체계 안에서 삶의 모든 의미를 설명하려는 시도는 필연적으로 한계에 부딪힌다.
가장 깊은 감동의 순간들, 가장 본질적인 깨달음들은 언어와 논리를 초월한다. 길가의 들꽃을 보며 느낀 경이로움, 낯선 이의 미소에서 발견한 인간적 연대감, 고독 속에서 만난 자기 자신. 이런 경험들은 그 어떤 방정식으로도 포착할 수 없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더욱 소중하고, 그렇기에 더욱 아름다운 것이다.
책상 위의 계산기를 만지작거린다. 숫자 버튼의 차가운 촉감이 손끝에 전해진다. 이 기계는 복잡한 계산을 순식간에 해결하지만, 인생의 진정한 문제들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다. 행복의 양을 측정할 수 없고, 슬픔의 깊이를 계산할 수 없으며, 사랑의 무게를 수치화할 수 없다.
창밖으로 새벽이 다가오고 있다. 몇 시간 후면 다시 출근길에 오를 것이다. 같은 시간, 같은 지하철, 같은 사무실. 겉으로 보기엔 어제와 다르지 않은 하루가 시작될 것이다. 하지만 이제 안다. 매일의 반복 속에서도 우리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같은 방정식도 변수의 미세한 차이로 전혀 다른 해를 만들어내듯, 우리의 하루하루도 겉보기엔 같아 보여도 그 안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숨어있다는 것을.
방정식을 풀어가는 과정에서 수학자들이 예기치 않은 아름다운 패턴을 발견하듯, 우리도 삶을 살아가며 예상치 못한 의미들을 만난다. 증명이 목적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발견하는 아름다움에 가치가 있듯, 삶도 정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이어가는 과정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컴퓨터를 끄고 일어선다. 어둠 속에서 창문에 비친 내 모습을 본다. 피곤하지만 어딘가 평온한 표정. 오늘도 나는 나만의 방정식을 풀었다. 완벽한 해는 아니었지만, 그 과정에서 작은 깨달음들을 얻었다. 그리고 내일도 계속될 이 계산 과정이, 바로 내 삶을 빛나게 하는 여정임을 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멈추지 않는 용기다. 수식이 담아낼 수 없는 영역이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이해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 것. 논리의 한계를 알면서도 사유를 계속하는 것. 그것이 인간다운 삶의 방식이 아닐까.
아침 공기가 차갑게 느껴진다. 곧 동이 틀 것이다. 방정식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나는 여전히 수식을 초월한 가치들을 찾아 헤맨다. 그리고 그 모순적인 여정 속에서, 삶이란 풀어야 할 문제가 아니라 경험해야 할 신비라는 것을 매일 새롭게 깨닫는다.
*프랙털 구조
부분이 전체와 비슷한 형태를 무한히 반복하는 기하학적 구조. 자연에서는 나뭇가지, 해안선, 눈꽃 등에서 발견된다. 작은 부분을 확대해도 전체와 유사한 패턴이 계속 나타나는 자기 유사성(self-similarity)이 특징이다.
*카오스 이론의 나비효과
초기 조건의 작은 변화가 전체 시스템에 커다란 차이를 만들어내는 현상. 이론적으로 브라질의 나비가 날갯짓을 하면 그것이 연쇄적으로 증폭되어 미국 텍사스에 토네이도를 일으킬 수 있다는 비유로 설명된다.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
쿠르트 괴델이 1931년에 증명한 수학적 정리로, 충분히 복잡한 형식 체계 내에서는 그 체계 내에서 증명할 수도, 반증할 수도 없는 명제가 항상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모든 수학적 진리를 담아낼 수 있는 완전한 형식 체계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