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마모토현과 JR구마모토역
규슈 횡단 여행에서 첫 번째 숙박지는 구마모토시였다. 구마모토시 여행은 구마모토성이 메인 테마인데, 이미 일본의 성 시리즈에서 구마모토성에 대한 이야기를 연재한 바 있다.
이번 편은 철도여행이지만 구마구마모토현은 어떤 곳인지,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철도여행기만큼 구마모토역에 대해서 조금 공부하는 시간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앞으로의 여행기를 진행할 때, 여행지의 역사나 문화적 배경을 먼저 이야기하고, 그다음이 역사적 인물을 설명하고 나서 본편 여행 이야기를 이어질 것이다. 이렇게 단계적으로 정리하는 것이 이 글을 읽는 이웃블로거들이 복잡한 일본 역사와 시대 배경 등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앞편에서 규슈 신칸센의 개통을 축하하는 CM에 대해서 이야기했었는데 이 프로젝트를 보고 감명을 받은 아키타시의 공무원과 센다이시의 시민이 트위터에 글을 올렸다.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해 장기 운휴상태였던 JR 동일본의 도호쿠와 아키타 신칸센의 열차가 운행 재개를 하는 날에 손을 흔들어 응원하자는 이들의 제안에 호응하여 그해 4월 29일에 코마치 115호가 운행을 할 때 수많은 이들이 철로옆에 나와 손을 흔들며 응원을 했다.
이 기획을 촬영한 영상도 남아 있다. 거대한 자연의 재앙에 수많은 이들이 희생되었지만 희망을 품고 다시 일어서보자는 따뜻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http://www.youtube.com/watch?v=XGTkNn8YxCE
자. 구마모토현은 어떤 곳일까?
구마모토현은 규슈 중앙부에 위치한 현으로 현청 소재지는 구마모토시. 면적 약 7400㎢, 인구는 약 169만 명(2025년 기준)이다. 고대에는 화산(아소산)이 많은 동네라서 히노쿠니(火の国)로 불렸다가 율령제 시기에 와서 히젠(肥前 : 오늘날의 나가사키현과 사가현 일대) 국과 분리되면서 히고(肥後) 국이 되었다. 이 시기는 대략 7세기말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이렇게 분할된 이후로 히노쿠니는 구마모토를 일컫는 별칭이 되었다.
(구마모토현의 지도. 북쪽으로는 후쿠오카, 사가현과 동북방향으로는 오이타현, 동남쪽은 미야자키현, 남쪽으로는 가고시마현 그리고 아리아케 해를 사이에 두고 나가사키현과 접하고 있다.)
여기서 잠깐 구마모토현이 있는 규슈에 대해 다시 한번 설명하고 가자. 규슈를 한자로 쓰면 九州. 아홉 개의 주라는 뜻인데 일본을 구성하는 네 개의 큰 섬 중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섬이다.
옛날에 9개의 쿠니(國=州)가 있었다고 해서 규슈라고 한다. 쿠니란 일본 고대의 행정구역이다. 율령제가 시행되고 나서 성립된 행정구역 단위에서 최상위가 고키시치도(五畿七道·오기칠도: 수도 교토와 그 주변을 5개의 '기'로 편성하고 그 이외 지역에 7개의 '도'로 편성한 것)이었고 그 바로 아래 단계의 행정구역이 쿠니였다. 다만 일본에서는 州가 國과 동일한 의미로 쓰였고 훈독으로 읽을 때 둘 다 '쿠니'라고 읽었다. 마찬가지로 규슈의 슈(州) 역시 쿠니(國)라는 뜻이니, 시코쿠의 코쿠(國)와 동일한 의미이다. 참고로 오늘날 일본 역사학계에서는 이런 율령제 하의 國을 영제국(令制國) 또는 율령국(律令國)이라고 부른다. 國이 오늘날에는 일본 같은 주권 국가라는 의미로 많이 쓰이기 때문에 그것과 구분하기 위해 용어를 만든 것이다.
고대의 쿠니를 현재 규슈 행정구역에 맞춰보면, 치쿠젠/치쿠고(지금의 후쿠오카 현)/부젠(후쿠오카 현 일부 및 오이타 현 일부)/분고(오이타 현 일부)/히젠(사가 현 및 나가사키 현 일부)/히고(구마모토 현)/휴우가(미야자키 현)/사츠마(가고시마 현 서쪽)/오오스미(가고시마 현 동쪽)가 된다.
구마모토 현 동부에 위치한 세계 최대급의 칼데라 활화산인 아소 산이 위치한 지역이기도 하다. 최대 도시는 후쿠오카이며. 규슈의 면적은 3만 6,752.6 km²(오키나와 현을 포함하면 3만 9,906.73 km²). 인구는 2020년 기준으로 약 1425만 명이다. )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이제 구마모토현의 역사에 대해 살펴보자. 구마모토현의 역사에 있어서 앞부분은 생략하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인물들이 등장하는 전국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1587년 규슈를 평정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삿사 나리마사를 히고의 영주로 임명하였으나, 민중반란에 의해 실각되고, 그 뒤를 가토 키요마사가 현 북부를,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현 남부를, 사가라가 구마지역을 지배했다.. 구마모토성을 축조한 가토 키요마사는 1600년 세키가하라의 싸움에서 몰락한 고니시의 뒤를 이어 이고를 통일하고, 영지 내에는 토목과 치수공사에 힘을 쓰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자, 여기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테고, 삿사 나리마사와 가토 키요마사, 고니시 유키나가도 일본역사에서 중요인물들인데 특히 가토 기요마사는 가등청정, 고니시 유키나가는 소서행장으로 바로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공한 장수들이다.
이 세 명중 삿사 나리마사와 가등청정은 구마모토성 이야기에서 이야기했다. 1632년 가토 키요마사(2대에서 몰락)의 뒤를 이어 히고에 들어온 호소가와 씨는 메이지유신까지 하고 54만 석을 다스리면서 다도의 히고고류와 일본전통예능 노의 기타류, 곤파루류, 문외불출의 히고육화, 스모의 원조인 요시다츠카사 가문, 히고상감 등 전통문화 육성에 온 힘을 쏟았다. 또 3대 영주 호소가와 타다토시(細川忠利)의 초청으로 구마모토에 온 검호 미야모토 무사시는 만년을 구마모토에서 지내면서「고린 노쇼」(五輪書)를 저술했다.
아마쿠사는 나가사키에 가깝고 영주였던 고니시 유키나가가 천주교신자였기 때문에 천주교가 널리 전파되고 콜레지오가 세워졌으며, 라틴어나 천문학 등 천주교문화가 번성했다. 그러나 1613년에 금교령이 선포되고 점차적으로 탄압이 심해지는 가운데 과중한 세금에 시달리던 농민 3만 7천 명이 1637년에 민란을 일으켰다. 이것이 아마쿠사 시마바라(天草島原)의 난이다. 시마바라의 난은 시마바라철도 여행기에서 다룰 예정이다.
그다음 해 쇄국령이 선포된 것도 이 민란이 큰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후 아마쿠사는 메이지유신까지 덴료(에도시대 막부직할 영지)가 되었다. 시간이 흘러 일본의 근대화가 시작된 메이지 유신 이후 1869년 영지반환, 1871년 행정개혁(번제도를 폐지하고 현을 설치)에 의해 구마모토번(영지)은 구마모토현으로, 히토요시번은 히토요시현으로, 아마쿠사는 일시적으로 나가사키현에 편입되었으며, 1876년에 현재의 구마모토현이 탄생했다.
1871년에는 구마모토의 학교와 구마모토서양학교가 설립되는 등 서양문명에 의한 근대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했으나 , 사족(무사계급)들의 신정부에 불만이 증대하여 1876년에 신푸렌의 난, 1877년에는 세이난전쟁이 발발하여 구마모토가 치열한 내전의 전쟁터가 되었다.
스이젠지공원 근처로 이축한 구마모토서양학교 교사관은 세이난 전쟁 때 사노 츠네다미(佐野常民)씨가 박애사 설립에 대한 허가를 받음으로써 일본적십자의 발생지가 되었고 1887년에는 제5 고등중학교가 설립되어 나츠메 소세키, 고이즈미 야쿠모가 이 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했다.(나츠메 소세키는 마츠야마 여행기에서 자세하게 다룰 예정이다)
구마모토역에 도착하기까지는 38분, 신칸센의 빠르고 쾌적한 느낌을 미처 다 느껴보지도 못할 짧은 시간이었다.
구마모토역은 1891년 7월 1일에 개업한 역으로 규슈 신칸센의 중간 정차역이기도 하고 재래선인 가고시마본선(鹿児島本線 모지코-가고시마)이 지나가고 , 호히본선(豊肥本線 오이타-구마모토)의 종점역이다. 역사는 구마모토성의 이미지를 형상화했다고 한다.
신칸센이 개통되면서 새로운 역사가 지어졌고 역사의 출구를 시라카와구치(예전 동쪽출구), 신칸센구치(예전 서쪽출구)로 이름을 바꿨다.
위의 사진은 1924년경의 구마모토역의 모습을 촬영한 것이다. 역 앞에 전차가 있는데 지금도 역전에 시전차 정류장이 있다.
위의 사진은 오늘날 구마모토역 앞에 있는 시전차 정류장의 모습이다.
1931년경의 2대째 구마모토역의 모습이다.
1958년경의 구마모토역의 모습이다. 3대째 역사이다.
구마모토역에 내린 나는 하카타역에서 미처 하지 못한 열차 예약을 마치고 구마모토성으로 가기 위해 역을 나섰다. (구마모토역에서 열차 예약을 해준 여성 직원은 친절했지만 그녀가 열차 예약을 잘못해 주거나, 빠뜨린 것이 있어서 약간의 차질이 있었다. 물론 제대로 확인을 하지 않은 나의 책임이 더 크다.)
구마모토역은 구마모토시의 중심지와는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정확하게 설명을 하면 남서쪽으로 2KM쯤 떨어져 있다. 그래서 구마모토성과 중심가를 여행하기 위해서는 시전차를 타고 이동해야 했다.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는 한국과 달리, 구마모토는 늦가을 날씨였고, 하늘도 당초의 일기예보와는 달리 푸른 하늘이 가끔씩 드러나고 있었다. 여행하기에는 따악 알맞은 날씨였다. 본격적인 여행의 시작이리만큼 다소 흥분되어 있었다. 시계를 보니 12시가 넘어서 있었다. 구마모토성을 보고 히토요시로 가기에는 시간이 빠듯했기 때문에 당초 여행 예정지였던 스이젠지는 아무래도 보기가 힘들 것 같았다. 점심 또한 도저히 시간을 내서 먹기가 어려울 것 같아, 히토요시로 가는 열차 안에서 에키밴으로 해결해야 할 것 같았다.
이 시점에서 구마모토시에 대해서 약간의 설명이 필요할 듯싶다. 구마모토시를 설명하는 사이트에서 찾아보면..
"구마모토시는 후쿠오카에서 남쪽으로 약 110km, 가고시마시에서는 북쪽으로 약 180km, 구마모토 현의 중앙부보다 약간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옛 성시를 중심으로 시가지가 발전해 왔으며 구마모토성의 동쪽에는 가미토리, 시모토리, 산로드 신시가로 불리는 중핵시 최대 규모의 아케이드 거리가 1km 이상에 걸쳐서 늘어서 있고 그 주위에 중심 시가지가 형성되어 있다. 중심 번화가인 도리토스지·가라시마 정 근처에는 시청, 일본 우정 주식회사 규슈 지사, 일본 최대 규모의 버스 터미널인 구마모토 교통센터, 2개의 백화점 등이 있다.
아소 외륜산으로 이어지는 시의 북동부와 동부는 일부 기복이 있는 지형도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아소의 화산재로 이루어진 완만한 농지나 주택지에 적절한 구릉지이기 때문에 국도를 따라 주택지가 펼쳐져 있다. 구마모토 시의 인구는 중앙부와 함께 동부에 모여 있다.
시의 남동부~남부는 구마모토 평야의 일부를 이루어 평탄한 풍경이 펼쳐진다. 시의 서쪽은 아리아케 해(시마바라 만)에 접한다. 시의 북서쪽에는 김포 산 (665m)·니노다케(685m) 등이 우뚝 솟아있고 그 동쪽 기슭에는 중심부로부터 뻗어있는 주택지와 삼림이 뒤섞여 나쓰메 소세키의 "숲의 도시"라고 불린 풍치를 지금도 보이고 있다."
(구마모토성에서 본 구마모토 시가지)
이미 구마모토성 이야기에서 설명했지만 이 성을 건축한 가토 기요마사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주로 울산 지역에 주둔했다. 가토는 울산성전투에서 조명 연합군의 공격을 받았으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태화강 하구를 통해 일본으로 달아났다. 가토는 한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왜성인 울산 서생포 왜성을 울산의 조선인들을 동원하여 쌓았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침공한 많은 일본장수들이 그렇듯이 수많은 울산 사람들을 강제로 구마모토로 끌고 갔다..
오늘날 구마모토 중심가에 '울산정 역'이 있는데 '울산정(우루산 마치 うるさんまち) 역' 안내 소개문에는 역의 이름이 '조선의 울산'에서 유래하였다고 쓰여 있다. 이 울산정 역 인근에는 가토 기요마사가 끌고 온 울산 사람들이 살았다고 알려져 있다. 구마모토에서는 '울산 간장'이라는 이름의 간장도 특산품으로 생산한다. 구마모토에는 가토가 왜성을 쌓았던 울산 지역의 지명과 동일한 서생(西生, nishio にしお)이라는 성을 가진, 끌려간 조선인의 후예라고 알려진 사람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씁쓸한 역사의 현장이 바로 구마모토시이다. 이런 역사적 인연으로 울산과 구마모토는 2010년 4월 26일 우호협력도시 체결을 맺었다.
다음 편은 규슈 횡단 여행의 두 번째 여행지, 히토요시 여행기가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