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근대화의 역사를 지켜보며
일본 JR 최남단역, 니시오야마역에서 가고시마주오역으로 돌아와, 다시 구마모토역으로 이동해야 했다. 숨 가쁘게 이어진 가고시마의 일정을 마무리 지어야 하는데, 앞서 여행기에서 가고시마 여행 끝부분에 다루기로 했던 가고시마주오역 광장에 있는 젊은 사츠마의 군상若き薩摩の群像, 그리고 가고시마 시 전차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가고시마 주오 역전 광장(사쿠라지마구치 광장)에 서 있는 이 젊은 사츠마의 군상若き薩摩の群像은, 1982년에 가고시마시가 50만 도시 달성을 기념해, 조각가 나카무라 신야中村晋也에 의뢰해서 만든 것으로 1865년 영국으로 떠났던 사츠마번 유학생들의 동상이다. 처음에는 19명 중 17명의 동상만 있었지만, 2020년에 사쓰마번 출신이 아니라서 동상이 없었던 호리 다카유키堀孝之와 다카미 야이치高見弥一의 상이 추가되었다.
이들이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기까지의 역사를 되돌려보면 1862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여기서 일본의 근대 역사를 참고해야 한다. 먼저 일본 근대 역사에서 중요한 시기인 막말, 혹은 에도막부 말기의 시대를 알아야 한다.
1. 막말(幕末)
사실 막부 말기라는 시기 구분에 대한 엄밀한 정의는 없으나, 1853년 6월 3일의 흑선 내항, 즉 매슈 페리가 이끄는 미국 해군 함대의 내항부터, 1867년 1월 9일에 에도 막부의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 1817-1913)가 대정봉환을 통하여 에도막부가 일본 전국 정권으로서의 지위를 잃고, 다음 해인 1868년 5월 3일에 메이지 정부군이 막부의 본거지인 에도성에 무혈입성하여 막부의 붕괴가 확실해진 때까지를 막부 말기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이외에도 대정봉환, 구막부군과 메이지 정부군의 전쟁인 보신 전쟁의 하코다테 전투의 종결(1869년), 막부체제가 완전히 폐지된 폐번치현(1871년 8월 29일)등을 끝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막부 말기는 도쿠가와 쇼군 가문의 당주가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將軍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쇼군)에 취임하여 여러 다이묘를 통솔하고 막부의 주재자로서 군림하는 막부 체제가 쇠퇴해 간 시기이다. 한편, 쇄국정책을 포기하고 개항하면서, 외국과의 통상무역을 시작함으로써 일본이 세계적인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제국주의 체제로 편입된, 일본 사회 자체가 극적으로 변화하게 된 시기이기도 하다. 막부 말기의 시대 상황은 많은 문학 작품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그 예로 시마자키 도손(島崎藤村)의 장편 소설 《새벽이 오기 전(夜明け前)》 등을 들 수 있다. 정치적 측면에서 막부 말기는 단지 과도기에 불과한 시기로 간주되지만, 이전의 에도시대와 이후의 메이지시대와는 다른 독자적인 정치 체제가 존재한 시기로 보는 견해도 있다.
막부 말기 사상은 막부 체제의 근거를 뒷받침하는 것과, 반대로 막부체제를 비판하는 것, 또는 체제를 대신하여 성립될 수 있는 국가상을 모색하는 것이 주를 이루었다. 더욱이 덴노와 도쿠가와 쇼군이라는 권위와 권력의 원천에 대해서도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려는 시도가 많았던 것도 큰 특징 중 하나이다. 이 시기에 크게 성행하여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사상 조류로는 존왕양이(尊王攘夷) 사상이 손꼽힌다.
자, 막부 말기는 정치, 사회적으로 굉장히 혼란스러웠는데 이이 나오스케의 암살(도쿄 이야기 코너에서 다룰 예정임) 이후 새롭게 등장한 세력이 사츠마(오늘날의 가고시마)와 조슈(오늘날의 야마구치)였다. 이들은 자체 번정 개혁으로 제도를 고치고 젊은 하급 무사들을 등용하였고, 상업자본을 배경으로 무기와 군사를 확충해서 막부도 함부로 할 수 없을 정도의 세력을 키웠다.
사츠마와 조슈 모두 존왕양이의 주장을 내세웠지만 사츠마는 비교적 온건론적인 입장인 반면에, 조슈는 강경론의 선두에 서서 이 두 세력의 대결도 만만치 않았다.
주-*존왕양이(尊王攘夷)
존왕양이는 일본 에도 시대 말기에 등장한 정치 구호이자 운동으로, "왕을 높이고 오랑캐를 배척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즉, 천황을 중심으로 일본을 지키고 외세를 배척하자는 사상이다. 이 구호는 막부 말기 일본 사회의 혼란 속에서 일본의 전통적 가치를 회복하고 서구 열강의 침략에 저항하려는 움직임으로 나타났다
안세이의 대옥사 이후의 일본은 막부와 사쓰마, 조슈의 대립의 시기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 치열한 대결에서 한발 먼저 앞서간 것이 사츠마였다. 사츠마의 실력자 시마즈 히사미츠는 에도로 상경한 뒤, 공무합체(公武合体, 일본어 고부갓타이)를 주장했다.
(시마즈 히사미츠의 초상화)
다시 말하면 천황의 조정과 쇼군의 막부를 하나로 합치자는 말로 이제는 1대 1로 합체를 하자는 것이다. 국내의 권력투쟁으로 자칫 인도나, 청나라처럼 서양 열강의 식민지가 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있었기에 천황의 조정과 막부사이에 공감대가 형성되었지만 이에 반발한 것은 조슈였다. 사츠마를 기회주의자 혹은 변절이라고 비난했던 것이다.
1862년의 데라다야사건(같은 사츠마번 무사들 간의 싸움, 사츠마번의 과격존왕파 무사들이 머물던 데라다야에 같은 무술수련을 했던 무사들이 찾아가서 과격존왕파 무사들의 계획 즉, 개국에 찬성하는 주요 인사들을 공격하겠다는 것을 말렸지만 설득이 되지 않자, 무력으로 진압에 나서고 결국 9명의 젊은 무사들이 희생되었던 사건) 이후 시마즈 히사미츠가 이끄는 사츠마가 정권의 실세가 되는 듯했으나, 사츠마로 돌아가는 길에 벌어진 나마무기 사건으로 인해 궁지에 몰리게 된다.
2.. 나마무기 사건
나마무기 사건(生麦事件, なまむぎじけん)은 1862년 9월 14일에 무사시노쿠니 다치바나 군 나마무기(현재의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 부근)라는 마을 근처에서 사쓰마 번주의 아버지인 시마즈 히사미츠(島津久光)의 행렬에 난입한 말 탄 영국인들을 행렬을 호위하던 사무라이들이 '무례'하다는 이유로 살해한 사건이다. 이 사건에 대한 배상 문제 때문에 사쓰에이 전쟁이 일어났다.
당시 일본에서 다이묘의 행렬은 일반인들에게도 큰 구경거리였지만, 이 날 죽음을 당한 영국 상인 리챠드 슨 일행은 행렬의 한가운데를 역주행하는등 일본인들의 입장에서 대단한 무례를 범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영국 정부가 책임을 추궁하였으나, 사츠마는 외국인들이 일본 법도인 하마평복(下馬平伏·말에서 내려 몸을 낮춤)의 예(禮)를 어긴 데 대한 정당한 조치였음을 들어 책임을 부인한다. 이 사건의 처리 문제로 인하여 사츠마와 영국 간의 사쓰에이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3. 사쓰에이 전쟁薩英戦争
1862년 9월 14일 발생한 나마무기 사건으로 촉발된 전쟁으로 영국은 에도막부와 사츠마번 모두에게 이 사건에 대한 책임자 처벌 및 사죄와 배상을 요구했고 막부는 보상금으로 10만 파운드를 지불했다. 그러나 양이(서양 배척)를 주장하고 있던 사츠마번은 2만 5천 파운드의 보상금과 책임자 체포 및 처벌에 대해서 끝까지 거부했고 영국 공사관은 단독으로 무력행사를 결정, 큐퍼 제독이 지휘하는 7척의 함대를 파견한다.
이듬해 7월 2일, 사츠마번의 본거지인 가고시마에 도착한 영국 함대는 처음에 교섭을 시도했으나 별 진전이 없자 8월 15일에 정박한 사츠마군의 증기선 3척을 나포했다. 사츠마 측은 이를 선전포고로 간주하고 해안 포대 80문으로 선제공격을 가했다. 때마침 들이닥친 강풍 때문에 큐퍼 제독은 나포한 선박을 끼고 대형을 유지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 귀중품을 꺼낸 후 소각처리하고 100문의 함포로 반격을 시작했다.
영국 함대는 해안 포대뿐만 아니라 시가지와 가고시마성에도 포격을 가하여 대규모 화재를 일으켰고 사츠마의 항구와 근대식 무기공장에도 피해를 입혔으나 거친 날씨와 예상 밖으로 강력한 사츠마군의 화력에 결국 전투를 포기하고 8월 17일 요코하마로 퇴각했다.
영국 해군은 1척 대파, 2척 중파의 피해와 큐퍼 제독이 승선하고 있었던 기함 HMS Euryalus의 함장과 부함장을 포함해 13명의 사망자와 50명의 부상자를 냈다. 사츠마는 비전투원 5~8명 및 부상자 18명 정도로 상대적으로 경미한 인명손실을 냈으나 영국 함대의 무차별 포격으로 인해 상당한 재산 피해를 입었다. 전투 이후 사츠마와 영국은 오히려 서로를 높이 평가해서 사츠마는 양이 정책을 거두고, 영국은 對프랑스 정책의 일환으로 막부 지지를 철회하고 사츠마와 직접 평화조약을 맺고 무기를 공급하게 된다.
당시 서양열강들은 세계최강이라는 영국군이 겨우 일본의 일개 지방정부를 상대로 전투를 포기하고 퇴각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으며, 미국의 뉴욕타임스는 1863년 10월 4 일자 기사에서 일본이 의외로 서구의 무기와 전술에 익숙하니 그 전력을 만만하게 봐선 안된다라는 평을 남겼다. 여담으로 쓰시마 해전의 영웅 도고 헤이하치로가 당시 사츠마의 해안포대 병사로 참전했었다고 한다.
이 사건이 갖는 의미는 매우 컸다. 사츠마는 무력으로 서양열강과 싸워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전쟁이전까지는 양이를 주장했으나, 전쟁 이후로는 개국으로 노선을 180도 바꾸었다. 그리고 이 입장의 변화를 위한 명분으로 막부 토벌을 외치게 된다.
한편으로 사츠마번은 강화 협상에서 영국에 유학생 파견을 제안했다. 영국 측은 싸운 상대로부터 배우려는 자세에 놀라면서도 이를 높게 평가했다. 사츠마번은 4명의 시찰원과 15명의 유학생을 결정한다. 이 유학생들이 바로 젊은 사츠마의 군상의 주인공들이다. 유학생들은 1865년 3월 사쓰마를 떠나 5월 런던에 당도했다. 유학생 15명 가운데 대학 입학 연령에 미달한 나가사와 가나에(長澤鼎)만 중학교에 입학하고 나머지 14명은 조슈번 유학생과 마찬가지로 UCL의 청강생이 된다. 시찰원 4명은 유럽 각지를 돌면서 국정 시찰이나 상담을 실시한다.
당시 영국으로 유학길에 올랐던 19명은 다음과 같다. (당시 유학생 대부분이 사츠마번 개성소 출신들이다. 개성소는 사츠번의 서양학교로서 서양의 학문과 어학을 공부하는 곳이었다. 쉽게 설명하자면 유학생 대부분이 사무라이 계급 출신의 인재들이었다)
1. 니이로 히라노부 ( 新納久脩1832-1889) 사절단장 당시 32세
영국에 도착 뒤, 유럽 각지를 돌아봤고 방적 기계나 무기의 매입등을 했다. 그리고 서양과 일본의 교육 차이를 본 그는 귀국 후 바로 11살짜리 아들을 프랑스로 유학을 보냈다. 귀국 후에는 사쓰마 번의 가로가 되지만, 메이지 원년에 가로직을 사임한다. 그 후, 한때는 메이지 정부의 중앙 관리가 되지만, 후년에는 가고시마현으로 돌아와 아마미(아마미 군도)의 '오오시마도시大島島司'로서 아마미의 사람들을 위해 노력했다. 1889년 12월 10일 57세로 사망.
2, 마치다 히사나리 (町田 久成 1838-1897) 당시 27세
1867년 6월 말 귀국, 영국에 있을 때, 대영 박물관이나 켄싱턴 박물관등을 견학해, 감명을 받았던 마치다 히사나리는 폐불훼석에 의한 문화재의 파괴나, 문화재의 해외 유출을 유감스럽게 생각해, 박물관 건설이나 문화재의 보호, 조사·보고를 진언하는 「대학 헌언大学献言」을 태정관에게 제출했다. 이후 박물관 건립을 위해 노력하여 박물관 초대 관장이 되었다. 1889년 갑자기 갑자기 관직을 사퇴하고 만년에는 시가현 미이지의 고시인 코죠인의 주지가 되었다. 1897년 9월 15일, 우에노의 칸에이지 메이오인에서 요양 중, 숨을 거둔다.
3. 테라시마 무네노리 (寺島 宗則 1832-1893) 당시 32세
번의(藩医, 번의 의사)였던 백부의 양자가 되어 나가사키나 에도에서 의학과 함께 난학을 배우고 있던 테라시마는, 시마즈 나리아키의 밑에서 증기 기관 연구나 가스등·사진기·전신기 등의 제작 실험등도 실시했다. 시마즈 나리아키가 죽은 후 다시 에도로 돌아와 1862년에는 막부의 분큐견구 사절단文久遣欧使節団의 일원으로서 후쿠자와 유키치 등과 함께 유럽 여러 나라를 돌아봤다. 귀국 후 사쓰마번의 선봉행船奉行을 하던 중 사쓰에이 전쟁이 일어나 영국의 포로가 되었다. 영국에 도착 뒤 주로 영국 외무성과의 외교 교섭을 했다. 1866년에 귀국한 뒤에는 외교관으로서 조약 개정에 임하여 외무경·문부경·원로원 의장 등을 역임했다. 1893년 60세로 사망
4. 고다이 토모아츠 (五代 友厚 1836-1885) 당시 29세.
1857년부터 번의 명령으로 나가사키에서 항해술을 배웠고, 1862 년 4월에는 막부 무역사절선 치토세마루에 편승해 상해에 도항, 증기선을 구입했다. 사쓰에이 전쟁 때 영국에 나포된 3척 중 1척이 아오타카마루青鷹丸이다. 그 나포된 배에서 하선을 거부했기 때문에 데라시마와 함께 영국의 포로가 되었다. 그 후, 나가사키에 체재 중에 유학 계획의 기초가 되는 「고다이 토모아츠카미 신청서五代友厚上申書」를 제출해, 유학 계획의 실현을 위해서도 힘을 다했다. 영국유학 후 유럽 각국을 돌며 살펴봤고 방적 기계나 무기의 매입등을 했다. 1866년 귀국 후에는 여러 관직을 거치며, 오사카에 조폐 기숙사(조폐국)를 유치했다. 1869년에 관직을 떠나, 이후 오사카에서 실업가로서의 길을 걸어, 오사카 경제에 지대한 공적을 남겼다. 오사카 상공 회의소 초대 회장. 1885년 49세로 사망
5. 호리 타카유키( 堀孝之) 유학 당시 19세.
나가사키의 네덜란드 (통역) 호리가에서 출생, 나가사키 출신. 통역으로서 참가. 고다이 토모아츠의 나가사키 해군 전습소 시절부터 친분이 있었던 것 같다. 사츠마번 영국 유학생으로서 유럽 각국을 돌았다. 1866년 3월 귀국했다. 고다이 토모아츠가 실업계로 옮겨간 이후에는 그의 사업을 도왔고 고다이 토모아츠가 죽은 후에는 유족을 돌보았다고 한다. 1911년 67세로 사망
6. 하타케야마 요시나리 (畠山 義成 1842-1876) 당시 22세
가고시마를 출발하고 나서 런던 도착 직후의 모습을 알 수 있는 「하타케야마 요시나리 양행 일기畠山義成洋行日記」를 남겼다. 유학하고 1년 정도 지난 1866년 여름, 프랑스로 여행을 떠나 견문을 넓혔다. 1867년 여름 미국으로 건너갔고 1868년 9월 뉴저지주의 럿거스 칼리지에 입학했다. 그 후 「이와쿠라 사절단」에 초빙되어 1873년 9월 사절단과 함께 귀국했다. 귀국 후는 문부성에서 들어가 도쿄 카이세이 학교(도쿄 대학의 전신) 교장, 도쿄 서적관·박물관 관장 등을 역임했다. 1876년 10월 20일 필라델피아 만국박람회 시찰로부터 귀국하는 도중, 34세로 사망.
7. 나고야 토시나리 (名越 時成) 유학 당시 17세
1866년 7월 나가사키로 귀국 후, 보신 전쟁에 종군한 이후의 경력이 없다. 1912년 65세로 사망
8. 무라하시 히사나리 (村橋 久成 1842-1892) 당시 22세
유학을 떠나기 전날 유학을 사퇴한 2명 대신 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1866년 귀국. 무라하시(村橋)가 다른 유학생보다 일찍 귀국한 것은 정신적 균형을 잃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귀국 후에는 보신 전쟁에 종군하여 하코다테 전쟁 종결의 평화 협상에 참여한다. 그 후 1871년부터 개척사에서 일했다. 유학 중에 본 서구의 근대 사회, 근대 농업을 손대지 않은 대지에서 실현하는 꿈을 부풀려, 하코다테 근교의 7중 개간장七重開墾場의 개설, 삿포로의 코토니에 양잠을 축으로 하는 둔전병촌 건설에 종사했다. 또, 독일에서 양조 기술을 배운 나카가와 키요베를 고용해, 맥주 양조장을 만드는 프로젝트의 리더가 되었다. 양조장은 처음에 도쿄에 설치하고 성공하면 삿포로에 건설할 예정이었지만, 다양한 관점에서 처음부터 홋카이도에 만들어야 한다는 품의서를 제출했고, 그것을 인정받아 양조장은 삿포로에 건설되었다. 이 개척사 삿포로 맥주 양조장이 현재 삿포로 맥주의 전신이 되었다. 1881년 이후 개척사를 사직한 이후 여행을 떠났지만 행적이 알려지지 않았다. 11년 후인 1892년에 49세로 사망했다.
9. 아사쿠라 모리야키朝倉盛明 당시 21세
나가사키에 유학하여 난학을 수학하고 사쓰마번개성소구독사가 된다. 출발 당시 의사 신분. 1866년 영국에서 프랑스로 건너갔고 1867년에 귀국했다. 귀국 후는 번의 개성소 어학 교사가 된 후, 메이지 정부에 출사해, 프랑스인 기사 프랑수아·코와니에의 통역으로 근무하는 것과 동시에, 효고현의 이쿠노 광산의 개발에 참여했다.
만년에는 교토에서 살았으며 1925년 1월 24일, 81세의 나이로 사망.
10. 사메시마 나오노부 (鮫島 尚信 1845-1880) 당시 20세
1866년 여름 요시다 기요나리(吉田清成)와 함께 미국으로 여행을 떠났고, 이때 종교인 해리스(ハリス を)를 소개받았다. 영국 유학이 금전적으로 막힌 1867년 여름, 유학을 계속하기 위해, 하타케야마 요시나리, 마츠무라 준조, 나가사와 마사시와 함께, 미국의 해리스에게 향했다. 1868년에 귀국했다.
귀국 후에는 메이지 정부에 출사해, 외교관으로서 영국, 프랑스와 외교에 참여했고 5년 후에는 귀국해 외무경의 테라시마 무네노리 아래 외무 차관이 되었다. 3년 후인 1878년에는 주불 특명전권 공사로서 다시 프랑스로 건너가 , 그 2년 후에는 포르투갈·스페인의 공사도 겸하는 바쁜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이로 인해 과로로부터 뇌출혈을 일으켜, 1880년 12월 4일, 공무 중에 35세의 젊은 나이로 객사했다. 12월 8일 파리 몽파르나스 묘지에서 성대한 장례식이 열렸다.
11. 마츠무라 준조 (松村 淳蔵 1842-1919) 당시 23세
유학 중인 1866년 여름, 모리 유레(森有禮)와 함께 러시아 여행을 떠났다. 1869년에는 아나폴리스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해 유학 시 주어진 해군술을 배우는 과제를 완수했다. 1873년 11월에 귀국, 그 후에는 해군 사관학교 교장으로 일본 해군 교육에 힘을 쏟았다. 1919년 76세로 사망
12. 모리 아리노리 (森 有礼 1847-1889) 당시 17세
유학 중인 1866년 여름, 마츠무라 준조와 함께 러시아 여행을 떠나 '항로기행'이라는 여행기를 남겼다.
1868년 귀국 후에 메이지 정부에서 근무했다. 후에 초대 문부 대신을 근무해, 일본의 교육 제도의 충실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폐도론廃刀論이나 계약결혼·영어교육론 등에도 나타나는 혁신적인 모리의 생각은 당시 일본에서는 반발을 낳아 1889년 2월 11일 '대일본국 헌법' 발포의 날 국수주의자에 의해 암살되었다. 향년 41세.
13. 타카미 야이치(高見弥一) 당시 21세
도사번(고치현 출신)으로 존황양이파의 도사근왕당의 일원으로서 요시다 도요 암살 사건을 일으켜 사쓰마번 저택에 숨은 오이시 단조를 말한다. 사쓰마번에 의해 발탁된 뒤 타카미 야이치로 이름을 바꿨다. 귀국 후, 일단은 메이지 정부에 출사해, 오사카운상소 大阪運上所근무를 명령받았으나 1872년에 가고시마에 돌아와, 그 후 가고시마에서 산수 교사로 지냈다. 1896년 가고시마에서 사망 당시 52세
14. 도고 아이노신( 東郷愛之進) 당시 23세
귀국 후 보신 전쟁에 종군하여 1868년 7월 8일 26세의 젊은 나이로 전사.
15. 요시다 키요나리 (吉田 清成 1845-1891) 당시 20세
1868년 9월에 뉴저지의 럿거스 칼리지에 입학했고, 이후 웨슬레이안 대학에서 정치 경제를 공부하며 은행 보험 업무를 습득했다. 1870년 겨울 귀국, 다음 해부터 대장성에서 근무하기 시작했다. 이와쿠라 사절단을 수행해 외채 모집에 참여했고 1874년 이후에는 미국 특명 전권 공사로서, 조약 개정에 전념했다. 1891년 46세로 사망.
16. 나가사와 카나에 (長澤 鼎 1852-1934) 당시 13세
사쓰마번의 역학자 집안인 이소나가 가문의 4남. 유학생 중에서는 최연소. 유학 후는 「나가사와 마사시」라는 이름으로 살았다. 영국에서는 런던 대학에 입학하지 않고 스코틀랜드 애버딘에 있는 토마스 그래버의 본가에 기숙하면서 현지 짐네 이지움 중학교에 다녔다. 지역 신문에 이름이 실릴 정도로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영국 유학이 금전적으로 막혔던 1867년 여름, 유학을 계속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캘리포니아에서 와인 양조를 성공시켜 사람들에게 '포도왕'이라고 칭해졌다. 미국에 영주하여 그곳에서 82세의 생애를 마감했다. 1934년 사망. 1983년에 레이건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일본 국회에서 「사무라이에서 실업가가 된 나가사와 마사시는 우리의 생활을 풍부하게 해, 일미 우호의 역사 속에서 특필해야 한다」라고 국회의 연설에서 경의를 표하면서 널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17. 마치다 신시로 町田申四郎 당시 17세
마치다 히사나리의 둘째 동생. 1866년 여름 귀국, 이후 행적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8. 마치다 세이조町田清蔵 당시 14세
마치다 히사나리의 막내 동생. 1866년 여름 프랑스로 건너가 보오 전쟁을 견학하고 8월 귀국. 그 후의 경력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19. 나카무라 히로나리(中村 博愛 1844-1902) 당시 22세
유학 중, 1866년 1월 영국으로부터, 프랑스로 유학지를 대신해, 1868년 귀국. 귀국 후에는 사쓰마번개성소의 프랑스어 교수가 되었다, 야마가타 아리토모,·사이고 쓰구미치의 통역으로서 다시 프랑스로 건너갔고 이후 메이지 정부에서 외교관으로 각국(이탈리아·네덜란드·덴마크)을 돌게 되었다. 1902년 10월 30일, 58세로 사망.
앞서 설명한대로 1865년에 영국으로 떠난 사츠마번 유학생들은 10대부터 3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었다. 이들은 영국과 유럽을 돌아보며 당시 일본과의 국력의 차이를 절감했고, 어떻게 해야 부국강병의 나라로 발전할지를 깨닫고 돌아왔다. 그리고 그들 중 대다수가 정치, 경제, 사회의 중추세력으로 성장했다. 이들만 유학을 간게 아니라 이들을 따라 수많은 젊은이들이 유럽으로, 미국으로 떠나서, 발전된 외국 문물을 보고 익혀 돌아왔다.
그렇다면 1865년, 당시 조선은 어떤 상황이었을까? 1865년은 고종 2년으로 당시 조선은 경복궁 재건에 착수했다. 1866년에 병인박해와 병인양요가 발생했고 그 결과 흥선대원군은 쇄국 정책을 강화했다. 메이지 유신이 1868년이었다. 역사에서 가정은 별 소용이 없는 것이지만 만일 이때 조선이 깊은 잠에서 깨어나 외국으로 유학생들을 보내고, 국력 신장에 힘을 기울였더라면 어땠을까?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점점 체제의 모순이 깊어지면서 국력이 후퇴했고, 일본은 에도막부시대에서 경제적으로 이미 조선을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그런 상황에서 서구 국가들에게 재빠르게 개국을 선택했다. 이에 비해 조선이 외국으로 유학생을 보내기 시작한 것은 1881년 일본으로 신사유람단, 그리고 1883년의 미국으로 보빙사 파견이었다. 16년의 차이가 결국 나라를 잃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1865년 사츠마번이 영국으로 유학생을 보낸 지 160년이 흘렀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나라가 되었지만, 이 동상들을 바라보는 여행자의 마음은 마냥 편안할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