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나토선 여행을 끝낸 나는 이스미선 여행을 시작하기 위해 열차에 올랐다. 자, 고미나토 이스미선 여행기 첫 편에서 이스미철도와 이스미선에 대해서 간단하게 설명한 바 있다.
"이스미철도는 일본 치바현 이스미군 오타키에 본사를 둔 제3 섹터 철도사업자로서 1988년 JR동일본의 키하라선을 넘겨받아 이스미선으로 개업하였다. 이스미선은 이스미 철도의 유일한 노선으로, 치바현 이스미시 오하라역과 이스미군 오타키마치의 카즈사나카노역을 잇는 전체 노선길이는 26.8km이다. "
먼저 JR 동일본의 키하라 선(木原線)이 어떤 철도노선인지 살펴보고 가자, 키하라선은 1925년부터 건설하기 시작해서 1930년에 개업한 철도 노선으로 1968년 적자 83선으로 지정되었고, 1981년에는 폐지승인까지 났다. 이후 1988년에 이스미 철도로 이관되어 이스미선이 되었다. 좀 더 설명하자면, 1930년에 개업한 키하라선이 1968년에 적자가 많이 나는 83개 노선으로 지정되어서 결국 1981년에 폐지하기로 했다는 것이고, 그러다 1988년에 일본의 국철이 민영화되면서 JR 동일본 관할이 되었다가 이것을 이스미 철도 회사로 노선을 넘겼다는 뜻이다.
또 하나 제3 섹터라는 것에 대해 미리 이야기를 해야겠다. 앞으로 일본 철도 여행기에서 수시로 등장하게 되기 때문이다.
제3 섹터는 처음에 미국에서 처음 언급되었을 때는 국영(제1섹터), 민영(이윤창출, 제2섹터)을 제외한 나머지 비영리 영역(third sector, voluntary sector)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일본에 단어가 수입되고 국철 민영화가 대두되면서 지방자치단체와 민간기업이 각각 지분을 출자해서 만든 형태의 회사(public-private partnership)를 의미하게 되었다.
일본의 사철들은 대부분 이런 형태를 가지고 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로 예산이 없기 때문이다.
공공서비스 목적으로 철도는 깔아야겠는데 지자체에 돈이 없으면 해당 사업을 민영화해서 운영하게 된다. 이럴 때 최소한의 공공성 확보를 위해서 100% 민간기업이 아닌 공공기관의 지분을 일부 투입하는 형태로 회사를 만들게 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적자가 심한 지방 로컬선 때문이다.
일본 국유철도가 민영화로 JR이 된 이후 각 철도 회사들은 영업수지가 안 나는 노선들을 마구 폐선시키게 된다. 그 대표적인 곳이 JR홋카이도로 국철에서 인계받은 노선 중 폐선시킨 노선 길이만 764km에 달한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주민들은 반발을 하게 되고, 지자체들이 별도의 회사를 차린 뒤 이러한 노선들을 인수해서 운영하게 된 것이다. 이런 회사들은 태생이 저렇다 보니 정작 영업은 하고 있지만 적자가 지속되어 결국은 폐업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세 번째는 신칸센 개통이다.
KTX가 개통해도 새마을호가 아직 기존선에서 운행하는 한국과는 달리, 일본은 신칸센이 개통되고 나면 당초에 있던 모든 특급이 신칸센으로 계승되며, 해당 지역을 운행하던 기존선 특급열차들은 거의 다 사라지게 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훨씬 빠른 신칸센을 놔두고 재래선 특급을 이용할만한 수요는 거의 없어지게 된다. 결국 해당 노선은 그 효용성이 급감해 버리게 되는데 이런 경우에 나오게 되는 병행재래선을 2번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지자체에 넘겨서 운영하게 만든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등장한 노선으로는 히사츠 오렌지철도(큐슈 신칸센과 병행), 아오이모리 철도와 IGR 이와테 은하철도등이 있다.
네 번째 철도 노선을 만들고 있다가 이런저런 사정으로 포기하는 경우, 해당 지자체가 그 노선의 일부를 인수해서는 마저 공사를 마쳐서 개통하는 경우도 있다. 호쿠에츠 급행이 이런 형태이다.
카즈사나카노역, 역사는 1989년에 개축했다.
카즈사나카노역은 고미나토선의 종점역이기도 하지만 이스미선 いすみ線의 역이기도 하다. 각각의 다른 철도 회사가 한 역을 사용하고 있지만 고미나토선의 열차에서 내려서 이스미철도의 열차로 환승하는 개념이다. 그래서 역명이 새겨진 간판 또한 각각이다. 위의 사진이 고미나토선의 역명 표지판이고 아래 사진이 이스미선 いすみ線의 역명 표지판이다.
이스미선을 봄에 여행하는 이유는 노선 주변의 유채꽃밭 때문이다. 매년 2월 하순부터 4월 상순 사이가 이스미선 주변이 꽃밭으로 변하는 시기이다. 이스미 철도의 길이는 전체 6.8km이고 그중 13km, 5만 3천 제곱미터가 노란 융단이 펼쳐진 듯한 유채꽃밭 선로로 변신. 봄 여행을 즐겁게 한다. 이스미선의 열차 사진들을 보면 한결 같이 유채꽃이 가득하다. 철도 마니아가 많은 일본에서 이 장면을 찍기 위해 많은 이들이 철로변에 나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유채꽃밭은 자연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다. 이스미 철도의 역사를 살펴보면 유채꽃밭을 왜 만들었는지 알 수가 있다.
앞서 이스미 철도는 1987년에 설립되어 1988년 JR 동일본의 키하라선을 넘겨받아 이스미선으로 개업했다고 설명했다.
일본 철도의 역사를 보면 유난히 1987년이 많이 등장하는데 1987년 4월 1일에 일본 철도가 각 지역별로 민영화되었기 때문이다. 만성적인 적자 노선이 JR 동일본으로 이관되었지만 성과를 기대할 수 없어 결국 노선을 이스미철도 회사로 넘겨버렸고 그때부터 원래의 노선이었던 키하라선이 이스미선으로 노선명이 바뀌게 되었다.
하지만 일본의 지방 중소 제3섹터 회사들이 그렇듯 존폐 문제에 직면(2006년 적자가 1억 2.700만 엔)하게 되었고, 이것이 치바현내에서 큰 논란이 일게 되었다. 결국 이스미 재생회의에서 2008년부터 2년간 이스미 철도를 유지하지만 2년의 유예 기간이 끝나는 2009년도 결산에서 적자가 나면 노선을 폐지한다고 결정을 내렸다.
수많은 일본의 지방철도들이 그러했듯이 이스미철도도 결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될 운명이었다.
그런데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 반전이 일어난다. 그것은 2009년 토리즈카 아키라(鳥塚亮)가 새 사장에 취임하면서부터이다. 대한항공과 영국항공 등 항공사에서 일하면서 경력을 쌓은 그는, 이스미 철도에서 사장을 공모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에 지원해서 122명의 다른 후보를 물리치고 사장에 취임했다. 토리즈카 사장은 '이곳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가 있습니다'라는 모토하에 무민 열차 및 관련 상품의 도입, 유채 꽃밭 조성, 닭새우 요리 코스를 맛볼 수 있는 레스토랑 열차 운행, 키하 28 · 52형 등 오늘날 찾아보기 힘든 추억의 열차 도입, 침목 · 철도 소유자 제도 도입, 대만 철도와의 협력 사업 개시 등 다수의 경영 개선책을 수립, 진행하였다.
또한 훈련비 700만 엔을 지원자 본인이 부담한다는 조건하에 이를 기관사로 양성해서 취업케 해 주는 프로그램을 진행했으며, 그 결과 40~50대의 남성 네 명이 기관사로서 제2의 인생을 살게 되었다. 이처럼 눈물겨운 노력 끝에 2010년 8월 6일 존속이 결정되었으며, 이후에도 경영 상황은 점차 개선되어 현재 이스미 철도는 제3섹터 철도의 모범 사례로 언급되고 있다.
이스미선을 운행하는 철도 차량은 크게 두 종류로, 하나는 쇼와시대의 레트로 느낌의 키하 계통(キハ系) 열차이고 또 하나는 무민을 디자인한 이스미노 계열(いすみの系)이다.
카즈사나카노역을 출발한 열차는 니시하타역, 후사모토역을 지나게 된다. 무인역들이다.
후사모토역
후사모토역
특별히 이스미선이라고 해서 다른 것은 아니다. 고미나토선이나 이스미선이나 별 차이는 없지만 봄이 한창인 보소반도를, 꽃으로 가득한 시골을 천천히 달려가는 그 여행이 내게는 더 잊지 못할 여행으로 남게 된 것이다.
히가시후사모토역
그다음쿠가하라역, 히가시후사모토역, 코야마츠역을 지나 오타키역에 도착했다. 지금까지의 역들은 하루에 탑승객이 5명 전후이지만 오타키역은 탑승인원이 2020년 기준 170명 정도이다. 이것은 오타키역이 옛날에는 오타키성의 성시로 번영했던 오타키 초의 중심 시가지에 위치해서, 역 주변에 행정기관, 공공시설, 중소 상점 등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스미선에서 유일하게 역무원이 있는데 이 역에 이스미철도의 본사가 있어 본사 직원이 역무원 역활을 한다.
오타키역
오타키역 승강장
또한 오타키 역(大多喜駅)은 「성을 이미지 한 역사에서 가스 채굴 발상지의 기념 가스등이 있는 역」으로 관동지방의 역 백선에 선정되어 있다.
이 근처 일대는 「보소(房総)의 작은 에도(小江戸)」라고 불리고 있으며. 2016년에 NHK에서 방영된 대하드라마 「사나다마루(真田丸)」가 방영된 것으로 찾는 이가 늘고 있다. 그 이유는, 도쿠가와 사천왕(徳川四天王)의 무장・혼다 타다카츠(本多忠勝)가 만든 「오타키 성(大多喜城)」이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일본은 매년 NHK에서 대하드라마를 1년 동안 방영하는데 보통 일본의 주요 역사 인물들에 대한 드라마이다. 드라마가 방영되면서 그 드라마의 주요 배경이 되는 역사적인 성, 혹은 도시, 장소등을 설명해 주는데 이로 인해 해당 장소에 여행객들이 급증하게 된다.
오타키성
오타키성의 천수각, 오타키성은 1521년에 축성되었다. 1842년에 천수가 소실되었고, 메이지유신 이후 1871년에 성은 철거되었다. 현재의 천수는 1975년에 옛 도면을 근거로 콘크리트로 다시 만들어진 천수이다. 이 성의 천수에 대해서는 원래부터 천수가 없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어, 아직 뚜렷한 결론이 난 것은 아니다.
혼다 타다카츠
여기서 혼다 타다카츠에 대해서 알아보고 가자.
그는 1548년 미카와국 구라마에(현재 아이치 현 오카자키 시)에서 혼다 다다토요의 장손이자, 다다타카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관례 후 받은 이름은 타다카츠, 아명은 나베노스케, 통칭은 헤이하치로로,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을 꺼리던 당시 풍습에 따라 보통 헤이하치로라 불리었다. 단, 관직이 있는 경우에는 이를 우선하였기에 타다카츠의 경우는 보통 나카츠카사노다이후라고도 불렸다.
출생 직후에 오다 가와의 전투에서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전사하여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하였다.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시동이 되었다고 하며, <토쿠가와 짓키>에 따르면, 1560년에 관례를 치르고 헤이하치로 타다카츠라 칭하며 오케하자마 전투에 첫 출전을 했다고 한다.
1563년에 미카와에서 일어난 일향종의 난 때, 대부분의 혼다 일족이 도쿠가와 가문에게 반기를 내걸었으나, 타다카츠는 일향종에서 정토종으로 개종하며 도쿠가와 가에 남아 무공을 세웠다.
이후 1570년에는 아네가와 전투에 참전하여 도쿠가와 군의 선두에서 대활약, 오다 노부나가로부터 은상(銀賞)을 수여(授與) 받는 동시에 "혼다 타다카츠의 용맹은 장비에 비견된다." "화실겸비의 용사(花實兼備の 勇士)." 말로 찬사를 받았고, 1572년에 타케다 군이 도쿠가와령을 침공하였을 때 히토코토자카 전투에서는 패퇴하는 아군의 후위를 맡아서 분전했고, 그 활약을 지켜본 타케다 휘하 무장 코스기 사콘이 "이에야스에게 과분한 것이 두 가지가 있으니, 당나라 투구와 혼다 헤이하치이니라."라는 교카(狂歌)의 낙서를 통해 그의 용맹스러움을 칭찬하였다. 이 해 12월에 미카타가하라 전투에도 참전하였고 1575년의 나가시노 전투에도 참전하였다.
18세기 초에 저술된 <번한보(藩翰譜)>에 따르면, 1582년에 일어난 혼노지의 변 당시에, 교토 일대에 머물고 있던 있던 이에야스가 오다노부나가의 사망소식에 그 뒤를 따라 자결하려고 하는 것을 만류하고 영지로 도피하도록 간언 하였다고 한다.
1584년에는 코마키/나가쿠테 전투에 참전하여 분전했고, 전투 후 도쿠가와 군이 철수할 당시에는 불과 수백의 군사만 거느린 채 추격해 오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대군을 가로막으며 용맹하게 싸웠다. 그의 대담한 행동을 본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일본 제일, 고금독보의 용사(日本第一、古今独歩の勇士)." "동쪽에 혼다 타다카츠라는 천하 무쌍의 장수가 있듯, 서쪽에도 타치바나 무네시게라는 천하 무쌍의 장수가 있도다." (東に本多忠勝という天下無双の大将がいるように、西には立花宗茂という天下無双の大将がいる)라고 극찬을 받았다.
이 일이 히데요시에게 상당히 깊은 인상을 남겼던지, 전후 도쿠가와가 히데요시의 패권을 인정하였을 때, 히데요시의 천거로 종오위하(従五位下) 나카츠카사노다이후(中務大輔)으로 서임되었다.
1590년에 히데요시가 호죠 가문을 멸하고 이에야스가 간토 250만 석의 영주로 전봉 된 후에는, 가즈사 국 오타키 10만 석의 영주로 봉해져, 같은 사천왕이자 절친한 동갑내기 동료인 사카키바라 야스마사와 함께 가신 중 영지 서열 2위에 올랐다(1위는 이이 나오마사의 12만 석). 1591년 장남인 타다마사가 이에야스의 손녀 쿠니히메와 결혼하면서 이에야스와 인척 관계가 된다. 특히 쿠니히메는 비명에 간 장남 노부야스의 딸이라 이에야스가 특히 아꼈다고 하는데, 그런 손녀를 시집보냈다는 점에서 이에야스가 그를 얼마나 아꼈는지 알 수 있다. 덧붙여서 쿠니히메의 아들 혼다 타다토키는 후에 이에야스의 손녀인 센히메와 결혼했다.
이후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400명의 군사를 이끌고 군감으로 참전한다. 이에야스의 본진에 종군하면서 각 다이묘들을 포섭하는 서장을 작성하였고, 전투가 시작되자 이에야스의 명령으로 군사를 이끌고 전투에 임했는데, 그가 상대한 서군의 세력은 우키타 히데이에, 시마즈 요시히로, 이시다 미츠나리 등이었다. 전투 도중 그가 탄 말이 화살을 맞아 낙마했는데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부하의 말을 빌려 타고 계속 싸우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같은 사천왕인 이이 나오마사와 쌍벽을 이루는 도쿠가와 군의 맹장다운 활약을 했다. 이 공적으로 이세국 구와나 10만 석의 영지를 받았다.
말년에는 이에야스를 비롯하여 2대 쇼군인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측근을 혼다 마사노부 부자 등, 관료 타입의 문치파로 채우며 권력에서 멀어졌고, 이에 따라 불우한 말년을 보냈다고도 한다. 1609년 6월에 가독을 장남 혼다 타다마사에게 물려주고 은거, 이듬해 10월 18일에 영지인 구와나에서 병사하였다. 향년 63세.
역구내에 있는 혼다 타다카츠의 상, 혼다 타다카츠의 흔적이 남아 있는 오타키역을 떠나 다음으로 들러볼 만한 역은 쿠니요시역国吉駅이다. 이 역은 일본의 유명 애니 캐릭터인 무민이 등장해서 인기가 높은 곳이다.
쿠니요시역
쿠니요시역은 이스미시 상공회관과 함께 있다. 2009년부터 '바람 살랑이는 산골짜기'(風そよぐ谷)라는 부역명이 붙어있다. 부역명 명명권을 철도 DVD 제작회사인 파시나 코퍼레이션이 구매한 것인데, 당시 이스미 철도의 사장 도리즈카 아키라(鳥塚亮)가 파시나 대표이사를 겸임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사장이 명명권을 산 것이다.
사진 왼쪽에 보이는 것이 무민의 캐릭터이다. 쿠니요시역을 지나면서 사실상의 코미나토, 이스미선의 여행은 끝이 난다. 열차는 천천히 마지막 역인 오하라역을 향해 달려가고, 역에 도착하면 도쿄로 가는 JR 동일본 열차로 바꿔 타야 했다.
사실 일본 철도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면, 이런 재래선의 보통열차를 타고 여행하는 것은 지루할 수도 있다. 하지만 봄이 오는 4월에 보소반도를 가로지르며 달려가는 이 열차여행은 늘 바쁘기만 한 나의 일본 여행에서 잠시 쉬어가는, 그런 여행이었다.
혼자 떠났던 여행인지라 외로울 수도 있었건만 덜컹거리는 열차에 몸을 싣고 유채꽃과 벚꽃이 마음껏 보며 달려가는 여행은 색다른 여행의 추억으로 남아 있다. 신칸센만이 일본 철도 여행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도 이 여행에서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빠르고 쾌적한 여행이 아니라, 조금은 불편해도 일본 관동지방의 봄 속으로 한가롭게 떠난 여행.. 그것만으로도 좋은 여행이었다.
*다음 철도 여행기는 홋카이도에 있는 JR 홋카이도의 소야 본선(아사히카와-왓카나이) 여행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