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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R 소야본선 여행기(4)-일본 최북단, 왓카나이

더 갈 수 없는 북쪽 끝 소야미사키

by 늘 담담하게

소야본선의 종점 왓카나이역까지 삿포로역에서 특급열차를 타면 5시간 12분, 아사히카와역에서는 3시간 42분(2024년 12월 기준)이 걸리는 장거리 열차 여행이다. 이렇게 장시간이 소요되어서 최근에는 삿포로에서 일본 국내 항공편을 이용해서 가기도 한다. 항공편은 1시간.

KakaoTalk_20231024_184003856_07.jpg 왓카나이 시가지


일본 최북단의 도시, 왓카나이는 일본 본토 북쪽의 관문으로서 알려졌다. 홋카이도의 시정촌에서 유일하게, 동해와 오호츠크해에 접하고 있다. 왓카나이 시의 최북단은 소야미사키 북서쪽에 있는 벤텐지마이며, 현시점에서 일본이 실효 지배하는 국토의 최북단이다. 소야미사키로부터 사할린까지는 대략 43km로, 일본에서 가장 러시아에 가깝다. 그 때문에 사할린, 러시아와 교류가 깊고, 시내의 교통 표지나 점포의 간판 등에는 러시아어의 표기를 곳곳에서 볼 수 있다.

npe61_fall339.jpg 도로 이정표에 러시아어가 표기되어 있다.

지명인 왓카나이는 아이누어로 ‘차가운/ 마시는 물의 개울’을 의미하는 ‘얌 왓카나이’ ヤㇺワッカナイ, Yam-wakka-nay)에서 유래한다. 에도시대 초기 이후, 항만으로서 풍족한 지리 조건과 양질의 어장을 가졌기 때문에 어업의 도시로서 발전했다. 에도 시대 중기 무렵부터는 국방상의 북쪽의 요충으로서 중시되어, 동북 지방의 번사들을 파견 하여 러시아를 감시하게 했다. 러일전쟁 후에는 가라후토(현재의 사할린) 항로를 개설, 다이쇼 시대에는 철도 건설도 이루어져 아사히카와 이북 최대의 도시가 된다. 태평양 전쟁 후, 북양 어업 기지로서 한층 더 발전했지만 옛 소련의 배타적 경제수역설정 후에는 기간산업인 어업이 쇠퇴해 인구가 계속 줄어드는 추세가 있다. (2024년 11월 30일 기준 인구는 약 30,423명)


삿포로에서 출발한 특급열차가 왓카나이역에 도착하게 되면 소야본선의 철도 여행은 끝이 나게 된다. 이제 왓카나이를 여행할 차례가 되었다. 이번 왓카나이 첫 번째 여행지는 일본 최북단, 소야미사키이다. 소야미사키는 왓카나이역에서 자동차로 약 40분 정도 거리에 있다.


10140_4_l.jpg 소야미사키 기념비와 소야 해협

일본 최북단이라고 하는 소야미사키宗谷岬를 찾아간 것은 한 여름, 가장 풍경이 좋을 때였다. 소야미사키의 위치는 북위 45도 31분 14초, 그때 내가 살고 있던 서울은 북위 37도 34분, 가장 북쪽으로 멀리 간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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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야미사키라는 지명은 아이누어 노테투"(notetu)에서 유래된 것인데 "노"(not)는 턱(사람의 턱) 곶 "테투에트)"는 코(사람의 코) 곶이라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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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야미사키는 그림에서 보듯 소야 해협(영어 라 페르즈 해협 La Pérouse Strait)을 사이에 두고 사할린과 마주 보고 있다. 소야미사키에서 마주 보는 사할린의 쿠리리온 미사키(일본명 니시노토로미사키 西能登呂岬) 와는 직선거리로 43km이다. 소야해협은 깊은 곳이 60-70m로 정도로 그리 깊은 바다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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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바로 일본의 최북단임을 알리는 기념비이다. 높이 4.53m로 북극성의 한 모서리를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가운데의 N자는 북쪽을 뜻한다 이 기념비는 1988년까지는 지금 위치보다 좀 더 남쪽에 있었지만 주차장을 건설하면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온 것이다.


이곳에서는 맑은 날이면 바다 건너 사할린의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소야미사키와 그 뒤편 언덕에 있는 공원에는 여러 가지 시설들이 있는데 이것들을 차례로 살펴보자..


우선 일본 최북단의 비 부근에 서 있는 인물 동상 하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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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상의 인물은 마미야 린조(間宮 林蔵1775-1844.2.26 에도)이다. 그는 에도시대 후반기의 탐험가로 사할린이 섬이라는 것을 실증해 낸 사람이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서 마미야 린조를 검색해 보면..


본명은 린소 [倫宗]. 1790년경 에도로 가서 유명한 지리학자 무라카미 시마노조[村上島野允]의 제자가 되어 측량술과 지도작성법을 배웠다. 1799년 북방영토 에조치[蝦夷地:지금의 홋카이도]의 방비와 개발을 목적으로 한 막부[幕府]의 에조치 조사(제3차)에 참가했다가 측량가 이노 다다타카[伊能忠敬]를 만나 제자가 되었다.


1808년 제4차 사할린 조사반의 일원으로 선발되어 마쓰다 단주로 [松田伝十郞]와 함께 사할린을 탐험·조사했다. 이 조사를 통하여 사할린이 반도가 아니라 섬이라는 추측을 한 그는 이를 확인하기 위해 다시 혼자 사할린 탐험길에 올랐는데, 당시에는 사할린이 흑룡강 하구의 남쪽에서 대륙과 연결되어 있다고 잘못 믿고 있었다. 마미야는 이 2번째 탐험에서 북위 53° 15′ 지점에 도달해 사할린이 섬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더 나아가 건너편 대륙으로 넘어가 흑룡강 하류 데렌까지 이르러 그곳의 청나라 관리들과 만나 흑룡강 하구와 사할린의 관계를 명확히 하게 되었다. 대원정을 마치고 〈도다쓰 지방기행 東韃地方紀行〉(3권)·〈호쿠이분카이요와 北夷分界余話〉 등을 작성해 에도로 돌아왔다. 1828년 그의 밀고로 다카하시 가게야스[高橋景保]가 독일인 지볼트(P. F. von Siebold)와 이노[伊能]의 일본지도, 마미야와 모가미 도쿠나이[最上德內]의 사할린 지도를 러시아의 탐험가 크루젠슈테른의 항해기 등과 교환한 사실이 폭로되어 '지볼트 사건'이 일어났다. 이후 계속된 밀정활동으로 인해 지리학자로서의 명성은 빛을 잃게 되었다.


계속된 밀정활동이라고 하는 것은 그가 오니와 반슈라는 쇼군 직할의 정보기관에서 일했었다는 것을 말한다. 그의 기록 중에서 우리나라와 연결되는 것이 하나 있는데 1836년에 일어난 덴포 다케시마 사건이다.



"덴포 다케시마 사건은 1836년 막부 허가 없이 다케시마(당시 일본에서는 울릉도를 다케시마로 불렀다)로 건너가 밀무역을 한 것이 발각돼 밀무역을 주도한 이마즈야 하치에몬과 하시모토 산베 등이 처형됐다. 이마즈야 하치에몬은 이와미 국 마쓰하라우라에서 운송선 1척을 소유하며 화물운송 및 운송 중개를 했던 해상화물 운송업자다. 하치에몬은 울릉도 주변을 통과하는 일이 있어 울릉도의 풍부한 임수산 자원에 대해 주목했다.



1833년 7월 울릉도에 도항, 큰 대나무와 진기한 목재, 큰 전복 등을 가지고 돌아왔으며 일본도 등을 가져가 조선과 중국 상인들과 교역하며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하지만 1836년 막부의 명으로 일본 각지의 상황을 조사하고 있던 마미야 린조에게 발각돼 하치에몬은 오사카 봉행소에서 파견된 자들에게 체포돼 하시모토 산베와 함께 12월 23일 처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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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마미야 린조의 흔적이 남아 있다. 사진에 보이는 것은 마미야 린조의 도하 출항의 땅이라고 쓰여 있는 표지석이다. 일종의 기념비인데, 실제 마미야 린조가 사할린섬 탐사에 나선곳은 소야미사키에서 3킬로쯤 떨어진 곳이라고 한다. 마미야 린조의 동상도 원래는 그곳에 있었으나 일본 최북단의 기념비가 세워지면서 이곳으로 옮겨왔다. 이 돌무더기는 그가 사할린섬 탐사에 나서기 전에 그의 고향 이바라키현에서 가져온 돌들을 세워 각오를 다졌다는 것이다.


마미야 린조가 사할린 섬으로 떠난 그때 그의 나이는 스물아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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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에 표기된 tatar 해협(러시아 표기가 타타르 해협)이 바로 마미야 해협이다. 유라시아 대륙과 사할린섬 가르는 해협인 마미야 해협은 북쪽으로는 오호츠크해와 남쪽으로 동해와 연결된다.


전체 길이는 약 663km, 깊이는 가장 얕은 곳은 약 8m, 해협에서 가장 좁은 곳이 약 7.3km이다. 겨울에는 바다가 얼어붙어 있어서 해협을 가로질러 횡단하는 일도 가능했기에 미국, 러시아, 중국 청나라도 사할린이 대륙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몽골군이 이 얼어붙은 바다를 건너 사할린침공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도 쉽지 않을 이 탐험길을 혼자 갔다는 것이 놀랍기만 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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Карта_Риндзо.jpg 마미야 린조가 만든 사할린 지도 -18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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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야미사키를 방문하는 여행자들은 계속 반복되는 노래를 듣게 된다. 노래는 바로 이 노래비에서 흘러나온다. 이 노래비는 자동센서가 있어 누군가가 다가가면 노래가 흘러나오게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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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의 제목은 소야미사키 宗谷岬. 1976년에 NHK의 모두의 노래에서 불려 히트한 곡인데 1980년에 이곳에 노래비를 건립했다.


이제 소야미사키 뒤편의 소야공원으로 가보자.. 여기에도 몇 가지 둘러볼 것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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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유명 작가인 미야자와 켄지(宮沢賢治1896- 1933)의 문학비이다. 1923년 8월에 제자의 취업 때문에 왓카나이에서 사할린의 오시도마리로 가는 연락선에서 지었다는 소야 2이라는 시의 한 구절이라고 한다.



여기에 적혀 있는 구절은 『はだれに暗く緑する宗谷岬のたゞずみと北はま蒼に唾るサガレン島の東尾や』인데 일본문학 전공자가 아니라서 정확한 시의 내용을 이해할 수는 없었다.


Miyazawa_Kenji.jpg 미야자와 겐지


그렇다면 미야자와 켄지는 누구인가? 그의 프로필을 찾아보면..


1896년 8월 27일생. - 1933년. 9월. 21일 사망. 일본의 시인, 동화작가, 농업과학자. 일본 이와테(岩手) 현 하나마키(花卷)에서 출생했다. 모리오카(盛岡) 고등농림학교에 재학 중에 불교 일련종(日蓮宗; 니치렌종) 신앙을 갖게 된다. 졸업 후 일시 동경에 가 있었으나 누이동생 토시꼬의 병 때문에 귀향해서 히에누키[稗貫; 이와테현 옛 군(群) 명칭]의 농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가르치면서 시와 동화를 썼다. 1924년 "봄과 수라"와 동화집 "주문이 많은 요리점"을 각각 자비로 출판했다. "봄과 수라"는 생전에 간행된 유일한 시집이고 몇몇 사람에게서 격찬을 받았지만 널리 읽히지는 않았다. 농민의 삶을 알고 싶어 농학교를 퇴직하고 스스로 농업생활을 실천하면서 라스(羅須)지인(地人) 협회를 설립하여 농업과학 연구와 농사 지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농민예술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종교와 자연과 과학이 융합된 독자적인 소재를 다루었고 일련종의 신앙에 기초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동화로는 "주문이 많은 요리점", "바람의 마타사부로", "은하철도의 밤" 등 100여 편이 있고, 시에는 "비에도 지지 않고", "영결(永訣)의 아침" 등 400여 편이 있다. 1933년 37세의 젊은 나이에 급성 폐렴으로 죽었다.


모리오카에는 이 사람을 기리는 켄지 박물관도 있다고 하는데 일본에서는 꽤 알려진 작가이다.

이 사람에 대해 좀 더 쉽게 설명한다면 바로 그가 쓴 은하철도의 밤이 우리나라 사람들도 대부분이 알고 있는 만화 영화 은하 철도 999의 모티브가 되었다.


이 문학비의 시를 쓰기 전년도인 1922년에 누이동생이 죽은 뒤 영결의 아침과 무성통곡이라는 시를 썼다.

(영결의 아침은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애니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에서 주인공 사유리가 수업시간에 읽는 장면에서도 나온다.)


그의 시를 일일이 소개하기는 힘들지만 " 비에도 지지 않고" 같은 작품은 우리나라 인터넷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의 작품 중. 우리 둘이는 라는 제목의 시를 잠깐 감상해 보자


우리 둘이는

꼭 1년을 함께 살았습니다

그녀는 다정하고 창백하며

그 눈은 항상 무엇인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꿈을 꾸고 있는 듯했습니다

함께 살게 된 그 여름의 어느 아침

나는 마을 변두리의 다리에서

시골 처녀가 가져온 꽃이 너무 아름다워서

20전 어치를 사 집에 돌아왔더니

아내는 비어있던 금붕어 어항에 꽂아

가게에 진열해 놓았습니다

저녁에 돌아오니

아내는 내 얼굴을 보며 묘한 웃음을 지었습니다

보니 식탁에는 여러 가지 과일과

하얀 서양접시 같은 것들까지 놓여있어서

어찌 된 일이냐고 물었더니

그 꽃이 오늘 낮에 꼭 2원에 팔렸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파란 밤의 바람과 별,

대나무 발과 혼을 보내는 불······

그리고 그 겨울

아내는 어떤 괴로움이란 것도 없이

시들 듯 허물어지듯 하루 아프고는 죽었습니다


1927년도 쓰인 시인데 당시 일본은 군국주의의 길로 나아가고 있어서 시대적 분위기와 그의 서정적인 문학과는 맞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그는 살아 있을 때 보다 오히려 사후에 더 유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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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구 일본 해군 망루의 모습이다. 제정 러시아와의 관계가 악화일로에 있던 있던 1902년에, 전쟁의 준비로서 구 일본 해군이 건설한 것으로, 당시 최강이라고 했던 러시아의 발틱 함대가, 소야 해협, 쓰가루해협, 동중국해의 어느 지점을 통과해서 블라디보스토크에 집결하는지를 파악하기 위해 세운 망루였다. 1904년 러일전쟁의 종결에 따라 망루로서의 임무는 끝났지만, 그 후, 태평양전쟁에서는 대잠수함 감시 기지로서 사용되었다. 왓카나이에서는 메이지 시대의 건축물로서 현존하는 유일한 것으로, 1968년 12월, 도시의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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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는 우리에게 잊을 수 없는 기념비가 하나 있는데 바로 기도의 탑으로 1983년 9월 1일의 대한항공 격추사건 때 희생된 사람들을 위한 위령비라고 할 수 있다. 2주기 때인 1985년에 세워졌다. 이 탑의 끝은 사건이 일어난 사할린 연안을 가리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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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항공기 격추 사건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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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일본인 유족회에서 작성한 비석으로 그 내용은..


사랑과 맹세를 바친다. 당신들이 사는 기쁨을 일순간에 빼앗아 간 것들은, 지금 전 세계의 사람들에게서 규탄되고 있습니다. 사건의 진상은 반드시 가까운 장래에 밝혀질 것입니다.


우리들은 당신들의 희생을 결단코 낭비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생명의 귀중함과 무력의 어리석음을 전 세계의 사람들에게 호소해 가는 것을 맹세합니다.


사랑스러운 사람들 편안하게 영면하십시오


1985 연 9월 1일 건립 일본 대한 항공기사고유족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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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희생자들의 명단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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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탑 중앙부를 보면 종이 달려 있어서 아래로 늘어진 줄을 잡아당기면 종이 울리게 되어 있다.

종을 울리고 나서 잠시 서서 희생자들을 위한 기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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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야미사키 부근에는 등대가 서 있다. 여행을 하면서 이렇게 해안을 가면 꼭 등대를 찾아보곤 한다. 이 등대는 소야 미사키 등대로서 소야미사키의 돌출부에서 120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높이 17m 해발 약 40m의 이 등대는 홋카이도 지역에서 세 번째로 개설된 등대인데, 네무로의 노샷푸미사키 등대, 오타루의 히요리야마 등대에 이어 1885년 9월 25일에 처음으로 점등했다



npe29_fall339 (1).jpg 네무로 노샷푸미사키 등대


npe2b_fall339.jpg 오타루 히요리야마 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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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비와 소야 해역 해군 전몰자 위령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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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독 이 소야 공원에는 평화에 대한 기념물들이 많은데 이것 역시 평화의 비(碑)라고 하는 것이다. 평화의 비는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 10월, 소야미사키 앞바다에서 일본해군에 의해 격침된 미국 해군 잠수함 와후호의 승무원 80명과 와후호에 의해 침몰된 일본 상선 5척의 희생자 690명을 위령하기 위해 전후 50년이 되던 1995년 9월에 미일 합동으로 건립되었다.


비문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비문―
1943년 10월 11일(날), 소야 해협에 있어서 5시간에 걸친 일본해군과 미합중국 해군과 비극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이 장소로부터 북동쪽 12마일의 소야 해협에 미국 잠수함《와후》SS238 호승무원 80명이 잠들어 있다. 또한《와후》호의 공격에 의해 격침된 많은 일본인 희생자가 이 해역에 잠들어 있다.


이 비는, 일본 측의 사람들과 와후호에 잠들어 있는 승무원의 가족들 의해 설립된 것이다. 일찍이 적이었지만 오늘은 , 형제로서 만나고 양국의 평화가 다할 때까지 또한 우리들이 지금 따뜻하게 있는 우정이 결코 다시 망가지는 것이 없도록 헌신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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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미잠수함 와후호에 의해 격침된 일본 측 선박의 이름과 희생자수.. 그리고 와후호의 승무원 수를 기록한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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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일 양국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다. 생각해 보면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미국에 의해서 개항을 한 일본.. 근대화의 모델은 독일이었다고는 하지만 메이지 정부가 막부를 타도하기 위해 받아들인 문물의 대부분은 미국이었다. 그리하여 막강한 구 일본 제국으로 성장했지만 결국은 미국을 공격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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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1945년 7월에 연락선 소야호를 미해군 잠수함의 어뢰공격에서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방패막이가 되었던 망루 방비대 소속 해방함(海防艦) 승무원 152명의 영혼을 기리는 위령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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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등지고 소야 구릉지대를 향한 이 동상. 바로 홋카이도의 우유 생산 100만 톤과 사육젖소 50 만두 돌파를 기념하기 위해 1971년 7월에 건립한 동상이다. 목장에서 일하는 젊은 남녀가 소야 구릉지대를 바라보며 天北酪農의 새벽을 맞이한다는 그런 상징이라고 하는데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조금 웃음이 나왔다.


소야미사키의 뒤편에는 소야구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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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야구릉은 소야미사키의 남쪽에 펼쳐져 있는데 표고 20m에서 400m의 완만한 구릉지대이다. 이 지형은 2만 년 전의 빙하기에 형성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북쪽에서 남쪽을 향해 고도가 높아지지만 깊은 계곡은 없다. 원래 이곳에는 나무들이 있었다는데 메이지시대에 산불에 의해 나무가 사라졌고 그 후 기온이 낮고 강풍이 불어 나무가 자라지 않고 있다. 그 때문에 육안으로 빙하시대의 지형을 살펴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소로서 홋카이도 유산에 선정되어 있다.


이 구릉지대는 주로 목장으로 이용되는데 이 소야구릉지대의 목장은 여의도 면적의 4배가 넘는 1,585헥타르, 초지의 면적이 1179헥타르로 도쿄돔의 250배 면적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사육되는 소의 수가 약 3000마리 정도이고 보통 5월 하순부터 10월까지 방목을 하고 있다. 사진상에 보이는 검은 점 같은 것들이 바로 이곳에서 길러지고 있는 흑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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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에 이곳에는 일본 최북단이라는 이름으로 영업을 하는 가게나 식당들이 많다. 사진에서 보듯 한결같이 일본 최북단이라는 명칭을 가게 이름 앞에 써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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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px-Soya_cape_Post_Office.jpg 일본 최북단 우체국


일본 최북단 우체국인 소야미사키 우체국. 여기서 누군가에게 긴 편지를 썼던 추억이 있는데... 다시 소야미사키를 가게 되면 다른 이들에게 엽서라도 보낼 생각이다.


내게 있어 소야미사키는 애틋한 혹은 아련한 향수나 감성 같은 곳들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인천공항에서 항공편으로 신치토세 공항까지 두 시간, 다시 왓카나이까지는 주간에는 다섯 시간 반. 지금은 없어진 야간열차 리시리로 가면 밤새 달려가야 한다. 그리고 다시 왓카나이역에서 차로 40 분을 달려야 소야미사키가 나온다.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정말 아득하게 먼 곳이었는데 이 소야미사키는 같은 시간대에서 가장 멀고 가장 북쪽이었다. 여름날... 나는 이곳 소야미사키에 도착했을 때... 아무 말도 없이 한참을 북쪽 바다만 보고 있었다

여러 가지 복합된 감정들이 마음 깊은 곳에서 떠올라 잠시 울컥하기도 했지만.. 나는 이곳이 평화로웠고 즐거웠다.


비록 그곳에서 쓴 편지가 그리움과 애달픔으로 가득한 것이었다고 해도...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던 여름날의 소야미사키는 아직도 여행의 기억에서 생생하게 떠오르는 곳이다.


*소야미사키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


언젠가 결혼을 눈앞에 두었다가 파혼을 한 어떤 남자가 이곳을 찾아가기로 했다. 그가 어디든지 마음을 정리하러 갔으면 해서 그때 내가 떠올린 곳이 바로 일본의 최북단도시 왓카나이의 동북쪽 소야미사키였다.


그 며칠 후 그는 삿포로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삿포로에서 특급열차로 5시간 반이나 걸리는 왓카나이로 갔다.


떠나는 그에게 내가 당부한 것은..


사랑했던 그 사람에게.. 그리고 그 자신에게 편지를 써서 가지고 갈 것... 그가 사는 곳에서 가장 멀리 갔으므로... 그곳에 모든 것을 남겨두고 올 것.. 돌아오는 길에서 뒤돌아보지 말 것... 등이었다..


이른 아침 그는... 왓카나이역에서 출발하는 관광버스를 타고.. 소야미사키로 갔다.


소야미사키의 위치는 북위 45도 31분 14초... 그가 살고 있는 서울은 북위 37도 34분이므로... 그가 갈 수 있는 시간과 현실적인 상황에서 가장 멀리 간 것이다.


그는 소야미사키가 보이는 언덕 위에서 푸르디푸른 오호츠크해를 바라보며 엉엉 울었다.


난데없이 목놓아 우는 그가 이상하게 보였을 것은 당연한데 마침 근처에 있던 일본인 할머니가 그에게 손수건을 내밀었다. 어찌 되었건.. 한참을 울고 나서 그는 최북단지점이 표시된 소야미사키의 기념비 앞 바닷가로 나아가 그가 가지고 왔던 2통의 편지를 꺼내어... 불에 태웠다. 순식간에 재가 된 편지들은 바람에 날려 바다 위로 떨어졌고 차가운 북쪽의 바닷속으로 밀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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