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비극, 9명의 전화교환수
왓카나이 역에서 차로 10분, 도보로 20분 정도 가면 왓카나이 시가지와 왓카나이 앞바다를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구릉지위에 왓카나이 공원이 위치하고 있다.
왓카나이 시가지 서쪽의 구릉지에 펼쳐져 거리 풍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약 45.2ha의 드넓은 왓카나이 공원에는 왓카나이(稚內)의 상징적 존재인 빙설의 문(氷雪門)과 가라후토견 비(樺太犬の碑) 등, 원내에는 수많은 기념물이 있다. 또한 전망시설과 향토자료관이 함께 있는 개기백년기념탑과 무료휴게소도 있어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많이 이용되고 있다. 2018년에는 왓카나이 공원에서 야경이 '일본 야경 유산'에도 등재되었다.
빙설의 문, 망향의 탑이다. 이 빙설의 문은 삿포로 출신의 조각가 혼고 신이 제작한 것으로 1963년 8월에 건립한 망향의 기념비이다. 태평양전쟁 말기 당시 일본이 지배하고 있던 사할린섬으로 소련군이 공격해 왔고 그곳에 거주하고 있던 일본인들은 본토로 피난을 해야 했다. 19세기 후반부터 사할린을 놓고 각축을 벌인 러시아와 일본, 그리고 태평양 전쟁 전까지의 그 역사적 과정이 어떻든 간에 사할린에서 생활하고,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로서는 고향을 잃어버린 셈이 되었고,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태평양 전쟁의 종전 과정에서의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이곳에 망향의 탑을 세운 것이다. 양쪽 기둥은 높이 8m로 문을 상징하고 중앙에 높이 2.5m의 여성상이 위치하고 있다.
이 여성 동상의 모습을 보면 얼굴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것은 전쟁에서 받은 고통을, 손바닥은 사할린과 가족을 잃은 슬픔을, 그리고 여성의 다리는 이 슬픔과 괴로움에서 빨리 벗어나기를 바라는 의미이다.
매년 8월 20일에는 이곳에서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이것이 이번 이야기 주제인 9명의 전화 교환수의 영혼을 기리는 위령비이다. 9명의 처녀동상九人の乙女の像(쿠닌노오토메 노죠)이라는 이름의 이 위령비는 1945년 8월 20일 발생한 사할린 마오카 우편 전신국 사건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한 9명의 전화교환수를 위한 것이다. 이 사건은 일본에서는 마오카 우편국사건真岡郵便局事件 혹은 기타노히메유리北のひめゆり 사건으로 불린다.
높이 1.8m, 폭 2.4m, 노보리베츠석으로 만들어진 이 위령비는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데 위령비의 오른쪽에는 전화교환수의 모습을 한 소녀상을 동판 부조로 새기고, 중앙과 왼쪽은 위령비 건립 당시 홋카이도 도지사였던 마사무라 킨고가 쓴 9명의 전화교환수들이 남긴 최후의 말과 9명의 전화교환수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 위령비도 빙설의 문과 함께 1963년에 건립되었다.
가운데에 새겨져 있는 글은 자살한 전화교환수들이 마지막으로 남겼다는 말로 "여러분! 이것이 마지막입니다. 잘 가세요. 잘 가세요 "라는 뜻이다.(실제로는 다른 말을 남겼다고 한다. 실제 그들이 남긴 말은 교환대로 총알이 날아왔어요 아무래도 어쩔 수 없습니다. 국장님, 여러분, 잘 가세요. 오랫동안 신세를 졌습니다. 잘 가세요, 건강하세요 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 9명의 교환수들이 자결을 선택한 그 전후 과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1945년 8월로 돌아가보자, 당시 일본은 패전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이 당시 사할린에는 많은 일본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여기에는 징용등으로 끌려온 조선인들도 있었다.
당시 사할린에 거주하고 있던 일본인들은 그해 3월부터 벌어졌던 오키나와 전투나, 역시 3월에 있었던 도쿄 대공습과 이후 일본 본토의 주요 도시들에 대한 공습으로 막대한 사상자와 피해가 쏟아지고 있던 본토와는 달리 비교적 평화로웠고 전쟁의 참화는 비켜나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정부에 의해 통제를 받고 있던 언론이 불리한 전황을 그대로 보도할리 없었고, 시시각각으로 닥쳐오는 엄청난 비극에 대한 정확한 대처 방안도 없었다. 그리고 이 시기의 일본인들은 1941년에 체결한 일소 중립조약으로 소련이 침공해 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고 그들에게 전쟁의 위험은 조금씩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소련의 스탈린은 유럽에서의 전쟁이 끝나면 2-3개월 이내에 일본과의 전쟁을 개시하기로 서방 연합군 측과 약속을 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1945년 5월 독일의 항복으로 유럽에서의 전쟁은 끝이 나고 미국과 영국, 그리고 소련군은 아시아로 군사력을 전환하여 일본에 대한 총공세를 준비했다.
유럽에서의 종전 이후 3개월이 지난 1945년 8월 8일, 소련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폭풍작전이라는 이름으로 만주, 내몽고, 사할린, 쿠릴열도, 한반도북부지역으로 공격을 개시했다.
이미 8월 6일에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고 사흘뒤인 8월 9일에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지만, 소련의 침공은 일본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원래 소련의 공격은 8월 중순경으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미군의 원자폭탄 공격으로 일본이 조기에 항복을 해서 전쟁 후의 이권을 얻기가 어려워질 것으로 예상되자 공격일자를 앞당겼다.
그리하여 8월 8일 소련 외무장관 바체슬라프 몰로토프는 모스크바 주재 일본 대사 사토에게 일소 불가침 조약의 파기와 선전포고를 전하고 동시에 만주 전역에서 소련군의 총공세가 시작되었다.
이것은 1945년 8월 소련의 폭풍작전의 상황도이다. 붉은 화살표들이 당시 소련군의 진격 상황을 표시하고 있다. 왼쪽에서 중앙 쪽은 중국의 만주와 시베리아 지역에서 소련군이 진격하는 것이고 표의 오른쪽 부분을 보면 홋카이도 위의 사할린의 작전 상황이 보인다.
이제 이야기를 사할린으로 옮겨가보자..
선전포고 사흘뒤인 1945년 8월 11일 소련군은 남부 사할린에 대한 공격을 개시한다. 소련군의 목표는 남사할린의 점령과 다음 목표지인 홋카이도 침공을 위한 거점 확보였다.
이 공격을 위해 소련군은 북 사할린에서 보병 1개 사단, 보병 1개 여단, 전차 1개 여단이 동원했고 조공의 형태로 북태평양 함대와 보병 1개 여단을 상륙작전에 투입했다. 일본군은 당시 사할린에 주둔하고 있던 제5 방면군 소속 88사단이 방어에 나섰다.
이때 벌어진 전투를 사할린 전투라고 부르는데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다른 지역에서의 전투는 중단되었지만 사할린에서의 소련군의 공격은 중단되지 않았다. 사할린전투는 8월 23일까지 진행되었고 8월 25일 소련군의 오토마리 점령으로 전투는 끝이 났다.
일왕의 항복 선언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소련군의 계속된 공격에 일본군이 격렬하게 저항을 한 것은 소련군의 홋카이도 상륙을 저지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면 9명의 전화 교환수들이 자결을 선택한 1945년 8월 20일 전후의 상황은 어떤 것이었을까?
사할린 전투 이전의 마오카 항의 사진이다.
역시 사할린 전투 이전의 마오카의 시가지
1945년 8월 10일. 가라후토청(사할린의 일본식 지명, 이하 가라후토로 통일) 장의 주도하에 철도국, 선박 운영회,·육해군 등 관계자 연락 회의에서, 가라후토 주민의 긴급 피난 요강이 작성되어 노약자, 부녀자, 환자, 신체장애자의 우선적 수송 계획이 결정되었다. 하지만 이 계획이 각 지역별로 전해진 것은 8월 12일이었다.
소련군의 침공 이전에 작성된 피난 계획에는 본토 피난의 대상자는 65세 이상의 남성과 41세 이상의 여성, 14세 이하의 남녀로 그 대상자는 약 16만 명이었고 이들을 15일에 걸쳐 이송하는 것이 목표였다. 이 선별 기준은, 전력에 도움이 되지 않는 민간인을 사전에 소개하려는 것과 식량부족이나 겨울의 야외 행동에서 체력이 약한 사람을 우선 피난시킨다는 계획에서 나온 것이었다. 오토마리를 주된 승선지로 모두 15척의 함선을 이용하는 것 이외에 소형정 30척 등이 동원되었고 육상에서는 승선지로 향한 피난 열차의 편성과 트럭 수송을 했다. 피난 지시를 받은 주민들은 승선 지를 향해 긴 행렬을 이루었고 그들 대부분이 공포에 떨고 있었다.
8월 16일에 마오카우편국장은 체신국장으로부터 여직원들에 대한 소개명령을 전달받는다. 여직원들은 주로 전화 교환수의 업무를 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피난을 한 후의 교환업무는 마오카 중학교 1-2학년 생 50여 명을 모아 소정의 교육을 시켜 대신하는 것으로 계획이 정해졌다.
그리고 이 날 아침 마오카 우편국의 아침 조회시간에 주사보였던 스즈키 카즈에로부터 잔류 교환수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주사보는 긴급 피난 명령이 내려지고 직장을 떠나는 교환수에 대해 설명을 하면서 만일 소련군이 상륙해도 전화 교환 업무의 이관을 할 때까지는 업무를 수행해야 한다며 그때까지 남아서 교환 업무를 계속할 수 있는 사람은 한번 가족과 상담한 다음 대답을 듣고 싶다고 말한다. 스즈키의 말에 전부가 손을 들어 남겠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이에 대해 스즈키는 오늘은 희망자를 모집하지 않겠다고 했고 가족과 상담한 후에 반장으로 전하도록 지시를 했다.
그렇게 16일이 가고 다음날인 8월 17일에, 전화 담당 주사가 「전원 피난 하지 않고 우편국에 머무르겠다고 혈서로 탄원할 준비를 하고 있다」라고, 국장에게 보고한다. 이에 대해 우편국장은 소련군진주에 벌어질 상황을 설명하는 것과 동시에 피난할 것을 설득했지만 대다수의 직원들이 응하지 않았다. 그래서 최종적으로는, 국장이 토요하라 체신국 업무 과장과의 협의 후, 체신성 해저 전선 부설선을 마오카항으로 회항시켜 서해안의 체신 여자 직원의 피난 수송에 임하게 한다는 계획을 승인받았다. 그리하여 배가 입항하면 승선 명령을 내려 대부분을 피난시키고 우편국에는 최종적으로 20명 정도의 교환수를 남기기로 한다. 하지만 이 계획은 예상외의 빠른 소련군의 상륙으로 햇빛을 보지 못했다.
이때에 남아 있게 된 잔류 교환수에 대한 증언들은 각각 엇갈린다.
어떤 이는 명령을 받았다고 증언을 하는 이도 있었고 또 어떤 이는 그것이 자발적이었는지 혹은 명령에 의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고 하며 선정기준도 정확하게 설명된 것이 없었다. 어쨌든 결국 남아 있게 된 사람들의 대부분이 근무연수가 짧은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들 상당수가 10대의 어린 여성들이었다.
그들은 어떤 생각으로 그곳에 남아 있게 된 걸까? 곧 닥쳐올 전쟁의 현장에서 떠나는 사람과 그곳에 남겨진 사람들,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이 20명의 잔류인원 중에 10대가 몇 명인지는 정확하게 확인된 바는 없지만 비극이 벌어진 8월 20일 오전. 당시 타카이시반 11명의 교환수들 중 6명이 10대였고 우에노반에는 적어도 1명의 10대 여성(후지모토 테루코 당시 17세)이 포함되어 있었다.
8월 19일 아침부터 마오카우편국은 비상체제에 들어갔다. 전화, 전신업무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루어졌기 때문에, 통상 3교대제로 운영되었지만 이때부터는 비상근무체제였고 야간근무는 우에노 주사보를 반장으로 하는 우에노반과 타카이시 주사보를 반장으로 하는 타카이시반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날 저녁 7시가 되자 전화 교환업무는 야근 체제가 되었다. 이 날밤, 당직 전화 교환수는 타카이시 반장의 11명의 여성교환수들이 근무하고 있었고 이 밖에, 전신과에는, 전신 주사· 히라이 시게루이하 7명의 직원이(남성 5명, 여성 2명) 근무하고 있었다.
자기에게 주어진 몫은 다한다는 일본인 특유의 직업 정신이었을까... 밤이 지나고 나면 그들에게 닥칠 위험이 어떤 것인지 그들은 알지 못했다.
홋카이도 구 본청사내에 있는 가라후토 자료관에 있는 당시 마오카 우편국의 축소 모형이다.
당시 비극이 벌어졌던 마오카 우편국의 내부 모습이다.
마침내 운명의 8월 20일이 밝았다. 이른 아침 소련군의 군함이 접근하고 있다는 보고가 전해지면서 타카이시 반장은 우편국장과 우편국의 간부들에게 긴급 연락을 했다. 이날 연락을 받은 직원들이 우편국으로 출근을 하려 하지만 상당수의 직원들은 쏟아지는 포탄 때문에 합류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혼란의 와중에 또 다른 교환수 시가 하루요가 합류해서 마오카 우편국내에 전화 교환수는 모두 12명이 되었다.
상륙한 소련군의 공격은 거세졌다. 격렬한 총성이 울려 퍼졌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전신접수를 담당한 오리 마사코는 우편국으로 향하는 도중에 사살되었다. (일본 후생성의 자료에 의하면 모오카에서 벌어진 전투로 인한 희생자수는 약 1,000여 명에 이르렀다.)
또 다른 근무조였던 우에노반의 후지모토 테루코도 결사대의 일원으로서 공습 때 바로 우편국으로 가게 되어 있었지만 계속 실탄이 날아다니는 상황이어서 무리였어요라고 그날의 상황에 대해 증언했다.
긴급 연락이 있은지 대략 1시간이 지난 후 소련 군함이 마오카 항에 나타나 2개의 작은 배가 상륙을 시도한다. (소련 측의 자료에 의하면 상륙 개시 시간은 오전 7시 33분이었다.) 소련 함대로부터 함포 사격도 시작되었다.
이때 마오카 우편국은 단층의 본관 건물과 2층 건물의 별관이 있었는데 전화 교환 업무는 별관 2층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소련 군함의 함포사격이 시작되면서 마오카 우편국내에도 포탄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공포와 혼란이 마오카 우편국을 덮쳤다. 이때에 여성 전화 교환수 12명은 별관 2층에 고립된 상태로 남아 있게 된다. 이들을 대피시키거나 보호해야 할 우편국장은 우편국으로 오다가 총상을 입고 소련군에 의해 생포당하고 만다.
이 급박한 상황에서 고립된 상태로 남아 있는 교환수들 중에서 가장 연장자인 타카이시 미키는 당시 24세.. 그리고 함께 있던 교환수들 대부분이 10대에서 20대 초반... 아직 세상사를 다 알지 못하는 나이 어린 그녀들이 겪었을 죽음에 대한 공포는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포성과 총성, 그리고 당시 일본여성들이 교육받았던 상황, 즉 미군이나 소련군이 들어오면 여자들은 대부분 겁탈당할 거라는 공포 등이 이들을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맨 먼저 행동에 나선 사람은 주사보였으며... 반장이었던 타카이시 미키가 청산가리를 마시고 죽음을 선택했다. 그 뒤를 이어 업무 대리를 맡고 있던 23세의 카가야 시게가 역시 청산가리를 마시고 자결했다. (자살의 경위에 대해서는 지금도 혼선이 있다. 타카이시 반장이 어린 교환수를 달랬다고도 하고, 갖고 있던 청산가리를 서로 나누어 나이가 높은 순으로 마셨다고 하는 것들이다.)
이어서 비번이었다가 이른 아침에 연락을 받고 합류했던 22세의 시가 하루요가...그리고 21세의 요시다 야에코, 19세의 타카이시 쇼코, 18세의 사와다 키미가 차례차례 자살을 했고 이런 순간에도 나머지 교환수들은 다른 전화국으로 최후의 연락을 했다.
그 연락이 끝나자, 17세의 와타나베 타루가 자살을 했고, 역시 17세의 마쓰하시 미도리가 자살하겠다고 다른 전화국으로 연락을 한 뒤 자살을 했으며, 마지막으로 이토 치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녀의 나이 당시 22세였다. 이렇게 9명이 청산가리와 모르피네로 자살을 한 뒤 남은 이들은 가장 어린 나이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사카이 사쓰에, 가와시마 키미코, 오카다 에미코... 모두 3명이었다.
이 상황을 전해받은 전신과 남자 직원이 2층으로 뛰어들어 그나마 남아 있던 사카이 사쓰에와 가와시마 키미코을 구해 본관으로 이동시켰고 오카다 에미코도 이어서 구출되었다. 이들의 사체는 10일 이상이 지나고 나서야 수습되어 가매장되었다가 그해 12월에 화장을 했다.
1945년 8월 20일 마오카 우편국에서 청산가리와 모르피네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9명의 교환수들의 실제 사진이다.
맨 위의 상단 왼쪽부터 타카이시 미키, 카가야 시게, 이토치에
두 번째 와타나베 타루, 사와다 키미, 요시다 야에코
세 번째 시가하루요, 타카시로 쇼코, 마쓰하시 미도리이다.
전쟁이 끝나고 이들을 기리자는 움직임이 관계자와 유족들 사이에서 일어나 앞서 기술한 대로 1963년에 사할린 관계자들과 유족들에 의해 이들을 추모하는 위령비가 왓카나이 공원에 건립되었다.
이후 이들은 순직처리가 되어 1973년 3월 31일 자로 8등 옥관장이 수여됨과 동시에 오늘날까지 말 많고 탈 많은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 되었다.
당초 처음 건립된 위령비에는 이들의 자살은 일본군의 명령이었다고 기술되어 있었다. 이 점은 계속 논란이 되었다. 당시 군의 명령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우익 세력에, 생존자들은 입을 다물고 결국 위령비는 다시 고쳐졌다.( 청산가리를 일반인이 쉽게 구한다는 것도 그렇고 그것을 하필 그 시점에 준비했다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위령비에 적힌 내용은... 이러하다.
"전쟁은 끝났다. 그때로부터 5일 후 쇼와 20년 8월 20일 소련군이 가라후토 모오카에 상륙을 시작하려고 했다. 그때 일본군과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전화(戰火)로 변한 마오카 마을, 그중에서 교환대로 향한 9명의 아가씨들 죽음을 안고 자신의 직장을 지켰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포탄의 작렬, 시시각각 닥쳐오는 신병의 위험, 죽음의 교환대를 향해 여러분 이것이 최후입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안녕히 가십시오 라는 말을 남기고 조용히 청산가리를 마시고 꿈 많고, 젊은 귀중한 꽃 같은 목숨을 놓아 직장에서 순직했다...."
이런 비극은 이곳만의 일이 아니었다. 가라후토의 다른 지역인 오오히라 탄광병원의 간호사 23명이 집단자살을 시도해 그중 6명이 사망했다. 어디 그뿐인가? 남태평양의 사이판에서도, 오키나와에서도 민간인들의 집단 자살은 있었다. (오키나와에서 자살한 130여 명의 여학생부대(히메유리부대) 사건도 있었다)
그렇다면 이들의 이런 비극의 원인은 무엇인가?
단순하게 전쟁 중에 흔히 일어나는 비극일 뿐인가? 도대체 누가 전쟁을 일으켰고 누가 이들의 목숨을 이렇게 값없이 버리도록 강요했던가? 바로 일본 제국주의 아니었던가?
어린 그녀들이 스스로의 삶을 버리도록 만든 일본 제국주의는 아시아 각국에 입힌 피해에도, 그리고 자국민들의 피해에도 제대로 된 사과를 한 적이 있었던가? 그것이 이 왓카나이 공원에 서 있는 9명의 위령비가 슬픈 역사의 흔적임에도 불구하고 마냥 이들을 꽃다운 나이에 순직한 젊은 여성으로만 인정할 수 없는 이유이다.
여기에는 또 다른 기념비가 있는데 바로 1968년 9월 5일 이곳을 방문한 히로히토 천황 부부가 빙설의 문과 9명의 교환수 위령비를 돌아보고 애달픈 마음으로 읊었다는 단가가 적혀 있다.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 중의 한 명인 히로히토 천황은 이곳의 사연을 듣고 슬펐을지 모르지만, 슬픔을 표현하기 이전에 그는 적어도 9명의 전화교환수는 물론 그가 천황의 자리에 있는 기간에 벌어졌던 전쟁에서 희생당했던 수많은 이들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했어야 했다. 그리고 그 전쟁에 끌려나가 희생당한 조선인들에게도 사과를 했어야 했다.
1945년 당시 사할린에 남아 있었던 일본인들은 약 40만 명, 소련군의 침공이전과 이후 약 10만 명 정도가 피난을 했고 그 뒤 대부분이 본토로 피난을 했다.
하지만 그곳에 있던 약 2만 3천 명 정도의 조선인들에 대해 당시 현지 일본 정부나 군대에서는 피난 계획을 알리지도 않았고 철저하게 그들을 내버려 뒀으며 심지어 일부 지역에서는 소련군의 스파이로 몰아 학살하기까지 했다.
이런 사실들이 왓카나이 공원에서 보게 되는 빙설의 문과 9명의 전화 교환수의 위령비는 비록 역사의 기록물이지만 한국인 여행자로서는 마음 불편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그 기념물들은 모두 과거 일본이 전쟁에서 희생자일 뿐이라는 것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