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카이 마코토 작품의 첫사랑
앞편에서 신카이 마코토 초기 작품들의 일관된 특징 중 하나가 첫사랑에 대한 깊은 집착이라고 이야기했는데.. 사전적 의미의 첫사랑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처음으로 느끼거나, 맺은 사랑이라는 게 사전적인 의미인데, 신카이 마코토의 영화 속에서 나타나는 첫사랑은 한결같이 그들의 삶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이었다.
별의 목소리에서 미카코와 노보루는 서로에게 있어서 첫사랑이었다. 미카코가 타르시안 탐사대와 함께 떠난 뒤에도 노보루는 애타게 그녀의 메일을 기다릴 뿐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는 않는다.(중간에 다른 여학생과 함께 거니는 장면은 나오지만 특별한 의미를 주지는 못한다.)
오히려 그는 미카코가 없는 혼자만의 일상을 묵묵히 견디면서 우주항공군에 들어가게 되고 미카코를 만나러 간다. 미카코가 있는 시리우스에서 보내지는 메일이 무려 8년 6개월이나 걸리는데도 그 긴 시간을 혼자서 버텨낸다. 그들이 함께 한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음에도 그녀를 잊지 못하고 마음속에 사랑을 간직한 것이다.
미카코 역시, 지구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노보루와 함께 한 일상을 간절히 그리워한다.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에 등장하는 사유리와 히로키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들 역시 중학교 시절에 만났다.
애니에서는 사유리가 책을 읽는 장면에서 처음 등장하고 그 시절에 마음을 두 가지 중 하나가 바로 사유리였다는 내레이션으로 사유리가 첫사랑이었음을 말한다. (소설판에서는 사유리에 대한 언급을 미나미 요모기타역에서의 만남이었다고 한다)
그 후 사유리와 조심스럽게 가까워지고, 츠가루 해협 건너 에조에 있는 거대한 탑에 함께 가자는 약속을 하면서 그들의 첫사랑은 정점에 이른다. 그 후 사유리가 갑자기 사라져 버리고 난 뒤, 탑에 함께 가자던 약속은 지킬 수 없게 되었고 도쿄의 고등학교로 진학한 히로키의 삶은 황폐해져만 간다.
초속 5센티미터의 타카키와 아카리의 만남은 전작들과 다르게 초등학교 시절이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할 무렵에 헤어진 뒤 타카키는 훗날 예전 그들이 함께 건넜던 건널목에서 아카리와 스쳐가기 전까지, 그 어느 곳에도, 그 어느 사람에게도 안주하지 못한다. 미련스러울 정도로 어린 날에 맺었던 첫사랑의 상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면 작품 속의 주인공들에게 있어 첫사랑은 어떤 의미였을까?
이들은 공통적으로 원하지 않은 이별로 인해 큰 상처를 받게 된다. 별의 목소리에서는 타르시안을 찾기 위해 우주로 떠나게 되는 것 때문에,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에서는 사유리가 깊은 잠에 빠져들게 되면서, 초속 5센티미터에서는 좀 더 현실적으로 부모님의 전근으로 인해, 이렇게 한결같이 주인공 자신이 변심하거나,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첫사랑이 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어찌해 볼 수 없는 외부적인 요인들로 갈라서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에게 있어 첫사랑은 쉽게 잊을 수 없는 것이 되고 만다. 또한 첫사랑은 단순히 감정적인 차원에만 머무는 게 아니라, 그들이 처해 있는 어려운 상황과 대비되는 따뜻하고 행복했던 일상으로 기억되기 때문에 삶 속에서 끊임없이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별의 목소리에서 미카코가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자..
"그리운 것이 너무 많아. 여기에는 아무것도 없거든. 예를 들면 말이야 여름을 적셔주는 비라든가, 가을바람의 내음이라든가, 우산에 떨어지는 빗방울이라든가, 봄 흙의 부드러움이라든가, 한 밤중 편의점의 평온한 분위기라든가, 칠판지우개의 냄새라든가, 한 밤중 트럭이 지나가는 소리라든가, 소나기 내릴 때 아스팔트 흙이라든가...."
일반적인 애니에서는 볼 수 없었던 너무나 감성적인 회상이다. 여름을 적셔주는 비, 가을바람의 내음, 우산에 떨어지는 빗방울, 봄 흙의 부드러움이라니, 섬세한 감정선을 건드리는 것들이다.
미카코가 그리워하는 것들은 사소한 일상의 것들이었으나, 이 사소한 것들을 노보루도 똑같이 그리워한다.
다르게 말하면 미카코가 말하는 모든 것들은 노보루와 함께 공유한 기억들이었다.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에서 사유리와 헤어지기 직전, 벨라실러를 만들다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히로키는 이렇게 그때를 설명한다.
"그 무렵에 평생 이대로 이 장소, 이 순간이 계속될 것만 같았다. 가고 싶어 하던 구름 저 편에 있는 그 탑은 내게 있어 소중한 약속의 장소가 되었다. 그 순간은 우린 두려울게 아무것도 없었던 것 같다. 사실은 아주 가까운 곳에서 세상과 역사가 움직이고 있었지만 하지만 그 무렵엔 기차 안에 감도는 밤 내음, 친구의 믿음, 공기를 감도는 사유리의 기척만이 세상 전부인 것만 같았다."
사유리의 이야기는 더더욱 절절하다.
"우리 셋이 보낸 그 온기 넘치는 세상. 그 시절이 마치 꿈처럼 느껴져, 그렇지만 그때의 추억만 잊지 않으면 어쩌면 난 앞으로 아주 조금이라도 현실과 이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깊은 수면 상태에서 헤매는 사유리가 그토록 그리워했던 것은 히로키와 타쿠야와 함께 보냈던 시절, 다시 말해 첫사랑의 기억이었다.
이렇게 세 작품의 주인공들은 한결 같이 첫사랑에 매여 있으며, 그들의 모든 기억은 첫사랑으로 연결된다.
또한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여주인공들은 공통적으로 남자 주인공들의 곁에서 떠나고, 그녀들의 떠남은 남자 주인공들의 삶에 깊은 정신적인 상처를 안겨주며, 떠나버린 그녀들을 찾아 헤매며 남은 삶을 고통스럽게 보낸다.
별의 목소리에서 짧은 상영시간인 탓에 노보루의 외로움과 상처는 별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미카코와 함께 했던 버스정류장 혹은 교실에서의 혼자 있는 풍경으로 묘사된다
이후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에서는 도쿄에서 혼자 살아가는 히로키의 외로운 일상들이 구체적으로 묘사된다.
"방에 도착 문을 닫을 때마다 마치 온몸의 뼈가 살을 찢는 듯한 격심한 통증을 느낀다. 내가 언제부터 이런 고통을 떠안게 된 것일까?"
"홀로 맞는 밤은 길게 느껴졌다. 시간이 잘 가지 않을 땐 난 근처 역까지 걸어가 누군가를 기다리는 척하며 시간을 때우고 그것도 질리면 방까지 가능한 천천히 돌아가곤 했다. 고등학교에 친구는 있었지만 교복을 입고 있을 때 말고는 어째서인지 그다지 같이 있고 싶지 않았다. 사람이 3천만 명 이상 사는 이 도시에서 생각해 보면 내가 보고 싶은 사람,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초속 5센티미터에서는 두 번째 이야기였던 코스모나우토에서 누군가에게 보낼 수 없는 문자 메시지를 보내는 것과 동급생이었던 스미다 카나에의 짝사랑을 거절하는 것, 그리고 도쿄에서의 미즈노 리사와의 관계가 실패하는 것으로 더욱더 분명하게 표현된다.(미즈노 리사와의 이야기는 감독 자신이 썼던 소설판에서 자세하게 설명한다)
이렇게 상처받고 방황하는 남자 주인공들이 혹시나 감독 자신의 모습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이 상처받은 영혼들은, 잃어버린 사랑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별의 목소리에서 노보루가 우주항공군에 들어가, 리시테아호를 구원하기 위한 함대에서 일하는 것.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의 히로키가 사유리를 데리고, 탑으로 향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자.. 이렇게 세 작품에 공통적인 특징이었던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조금 길어진 것 같은데 첫사랑의 이야기는 계속 이야기를 진행하면서 더 하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