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타깝게도 참는 법에 너무나 익숙하다. 어린 시절에는 “좋다고 티 내지 마라, 겸손해야 한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청년이 되어서는 “어른스럽게 굴어야 한다”는 사회적 규범이 덮쳐왔다. 결혼 후에는 부모로서, 직장인으로서 감정을 억누르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슬퍼도 말하지 못하고, 기뻐도 웃지 않는 게 미덕이라 여겨졌다.
그러다 보니 웃고 싶은 순간에도 웃지 못하고, 감정이 북받쳐 올라와도 담담한 척하며 넘어갔다. 기쁜 일이 생겨도 "이 정도 가지고 뭘…" 하며 의미를 축소했고, 누가 칭찬을 해도 "별거 아니에요"라며 얼버무렸다. 그렇게 마음속 불꽃 하나하나를 애써 덮어두며 살아왔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니, 가슴속 무언가가 사라진 느낌이다. 감정을 오래 감추다 보면, 어느 순간 느끼는 능력 자체가 무디어지기 마련이다. 웃고 싶은데 웃음이 안 나오고, 기쁜데 그 기쁨을 누릴 줄 모르게 된다. 더 이상 마음이 쉽게 들뜨지 않고, 감탄하는 일도 줄어든다. 삶은 편평해지고, 감정은 굴곡 없는 평지가 되어버린다.
이제는 스스로의 감정에 솔직해야 한다. 그렇게 사는 것이 정말 건강한 삶인가? 감정을 꾹꾹 눌러 살아온 것이 과연 옳은 일이었는가? 오히려 감정을 누르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그 기쁨을 마음껏 누리는 것이 진짜 ‘어른’의 삶이 아닐까. 감정을 억누르는 시대는 이제 끝났다. 이젠 진짜 나의 감정을 마주할 시간이다.
기쁨이란 반드시 큰 성취나 행운에서 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건 ‘작은 기쁨’이다. 바삭하게 잘 구워진 토스트 한 조각, 아침 햇살이 커튼 너머로 스며드는 순간, 주차를 한 번에 성공했을 때의 뿌듯함. 이런 일상의 사소한 순간들이야말로 인생을 따뜻하게 만든다.
그런데 우리는 그 소소한 기쁨을 ‘별것 아닌 것’으로 취급했다. 큰 목표, 큰 성과만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겼고, 사소한 즐거움은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다. 그러나 이런 사소한 순간들이 쌓여 인생의 온도를 결정짓는다. 사막에서도 바람이 불면 체감온도는 달라지듯, 일상의 작은 기쁨들이 삶의 분위기를 바꿔놓는다.
심리학자들은 ‘마이크로 조이(micro-joy)’라는 개념을 이야기한다. 이는 일상에서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사소한 즐거움을 의미하며, 이 조그만 기쁨이 꾸준히 쌓이면 삶의 질이 눈에 띄게 향상된다고 한다. 결국 인생의 차이는 거대한 기쁨의 유무가 아니라, 작은 기쁨을 얼마나 자주, 깊이 느끼느냐에 달려 있다.
사소한 기쁨은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허락하는 것’이다. 내 삶에 기뻐할 이유가 있음을 스스로 인정하고, 그것에 감사하고, 그것을 느끼는 시간을 의식적으로 가져야 한다. 그래야 기쁨이 생긴다. 기쁨은 자연스럽게 오는 것이 아니라, 준비된 사람에게 찾아온다.
오랫동안 기쁨을 억누르다 보면, 그 감각이 퇴화한다. 마치 잘 쓰지 않던 근육이 약해지듯, 감정 표현도 사용하지 않으면 무뎌진다. 그리고 어느 순간, 기뻐해야 할 순간에도 무덤덤하게 반응하게 된다. 그건 무게 있는 태도도, 어른스러운 모습도 아니다. 오히려 감정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 감정은 되살릴 수 있다. 감각은 다시 훈련될 수 있다. 기뻐하는 연습은 작고 쉬운 일부터 시작하면 된다. 좋아하는 음악을 따라 부르고, 맛있는 걸 먹을 땐 소리 내어 감탄하고, 산책 중 예쁜 꽃을 보면 사진을 찍어보는 것. 처음엔 어색해도, 반복하면 감정의 근육은 다시 살아난다.
기쁨을 표현하는 데 가장 큰 방해물은 ‘눈치’다. 누군가 볼까 봐, 철없어 보일까 봐 망설인다. 그러나 이젠 주변의 시선보다 나 자신의 감정이 더 중요하다. 나를 감동시킨 작은 순간들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 순간을 즐기는 데 집중해야 한다. 그게 자신을 아끼는 방법이다.
기쁨은 감정의 회복이다. 50대 이후의 인생은 감정의 재건이다. 억눌렀던 기쁨을 꺼내어 보는 것, 그 자체가 삶의 전환점이 된다. 웃고, 즐기고, 기뻐하는 삶은 나를 더 나답게 만든다. 이제는 훈련이 필요하다. 감정에 솔직해지는 연습, 그것이 우리 삶의 새로운 습관이 되어야 한다.
한 가정의 중심이 된다는 것은 무게가 크다. 그래서 우리는 ‘기쁨조차도 조심스레 누려야 한다’는 묵직한 책임감 속에 산다.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자녀의 미래를 위해 절제하는 삶을 살아왔다. 하지만 그렇게 사는 동안 정작 내 얼굴에서는 웃음이 사라졌다.
문제는 내 감정이 가족에게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당신이 웃지 않으면, 가족도 웃지 않는다. 당신이 무표정하면, 자녀의 얼굴에도 표정이 없어진다. 기쁨을 억누르는 당신의 모습은 곧 가족 전체 분위기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반면, 당신이 밝게 웃는다면 가족도 훨씬 편안해지고 따뜻해진다. 이토록 부모의 감정은 가족 전체의 온도를 바꾼다.
특히 아버지의 웃음, 어머니의 환한 표정은 자녀에게 큰 안정감을 준다. "우리 부모님이 행복해 보여서 좋다"는 말은 자녀의 입에서 쉽게 나오지 않지만, 그 감정은 아이들 마음에 깊이 새겨진다. 내가 웃는 모습, 내가 기뻐하는 표정이 가족에게는 큰 위로이자 격려가 된다.
이제는 내 감정을 숨기는 것이 가족을 위한 일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나부터 웃고, 나부터 기뻐할 수 있어야 가족도 행복해질 수 있다. 나의 기쁨은 가족을 위한 선물이다. 이기적인 일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따뜻한 배려다.
하루를 돌아보자. 기쁠 수 있었던 순간이 있었는가? 그때 당신은 웃었는가? 아니면 그냥 넘겼는가? 대부분은 기뻤지만 표현하지 않았다. 그저 속으로 미소만 지었거나, 아예 바빠서 느끼지도 못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지나치면 인생 전체가 무색무취가 된다.
이제는 결심해야 한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기뻐할 수 있는 순간에 마음껏 기뻐하자. 그런다고 그 누가 뭐라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순간을 제대로 느껴주는 자신이 고맙다. 작고 사소한 순간에 웃을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야말로 진짜 인생을 아는 사람이다.
“이 정도는 기뻐할 일도 아니다”라는 말 대신, “이 정도면 충분히 기쁘다”라고 말해보자. 감사한 일이 있다면 그 감정을 표현하고, 좋은 일이 생기면 그 기쁨을 음미하자. 사진을 찍어두고, 메모에 남기고, 누군가에게 말해주는 것도 좋다.
기쁨은 허락받아야 느껴지는 감정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내게 허락해야 누릴 수 있다. 오늘 하루,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해보자. “그래, 이 순간을 마음껏 누려도 돼. 기뻐해도 돼.” 그 용기가 당신의 삶을 다시 따뜻하게 바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