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엄마 퇴원시킬거야!
일반병실에서 엄마의 증세는 호전되었고 2주가 지나 하급병원으로 옮길 시기가 되었다. 주치의의 추천으로 엄마는 대학병원 내에 있는 뇌경색 재활병동으로 전원을 했고 주치의 진료 아래 재활치료를 이어갈 수 있었다. 재활치료를 하면서 엄마의 증세는 눈에 띄게 호전되었다.
얼굴의 반이 떨리던 증상도 거의 없어졌고 말도 더듬지 않았다. 비록 보행보조기를 이용하기는 했지만 걸을 수도 있었다. 다리의 힘이 전부 돌아오지는 않았지만 재활자전거도 탈 수 있을 만큼 다리힘도 좋아졌다.
병실에서의 면회는 불가능했고 목소리라도 들어보려고 전화를 하면 통화가 너무 힘들었다. 매일, 매번 이 통화 중이었다. 자매만 여섯이었고, 동서도 넷이었다. 한 동네에서 오래 살다 보니 친목모임도 많았고 대화 상대가 넘쳐났다. 엄마는 항상 바빴고 주변은 늘 시끌벅적 소란스러웠다.
그렇게 엄마의 재활은 성공을 향해 가는 듯 보였다.
02. 엄마 퇴원시킬 거야!
입원기간 동안 뇌경색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싶어 인터넷을 뒤적거리던 중 <산정특례>라는 제도를 알게 되었다. <산정특례>란 특정 질환으로 진단받은 환자들의 의료비 부담을 줄여주는 제도로 "암, 희귀 질환, 중증질환 환자"의 의료비 지원을 강화하는 정책이다. 뇌경색도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산정특례 적용을 받기 위해서는 30분 이내에 응급실에 내원해야만 지원이 가능했다. 엄마는 이상 증상이 보이자마자 119를 통해 입원했으니 가능할 것도 같았다. 나도 의사를 만나게 되면 물어볼 테니 동생도 꼭 물어보라고 당부했었다. 그러나 나는 의사를 만나지 못했고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잊어버렸다. 무심하게도.
엄마가 입원한 지 한 달쯤 지났을 무렵 느닷없이 동생이 엄마를 퇴원시켜야겠다며 전화를 했다. 엄마의 병실 옆에 코로나 전용병동이 만들어지는데 불안해서 안 되겠다는 것이었다. 지금이야 백신도 나오고 치료제도 개발되어서 위험성이 많이 낮아지기는 했지만 당시만 해도 코로나는 위험한 전염병이기는 했다.
주치의가 퇴원을 권한 것도 아니고 만류를 하는 상황에서의 퇴원은 불안하기만 했다. 병실 이동을 제안해 봤지만 재활병동 특성상 병실 이동은 불가능하다는 답변만 전해 들었다. 동생은 "OO대 재활전문요양병원"으로 전원 절차를 밟아놨으니 그렇게 알라고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엄마의 퇴원인데 당사자인 엄마의 의견도, 남편인 아빠의 의견도, 누나인 나의 의견도 심지어 전문가인 의사의 의견도 없었다. 오로지 아들인 동생 자신의 의견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하고 싶으면 반드시,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해야만 하는 동생의 고집은 우리 가족 그 누구도 말릴 수 없었다. 그렇게 자라왔고 그렇게 행동하도록 부모님이 거들었다. 평생. 우리 집 권력깡패이자 독재자는 체스판을 쥐고 흔들듯 그렇게 가족들을 흔들며 성장해 왔다.
말해봐야 나만 '나쁜 년'되는 상황을 오늘까지 겪어오면서 그 세월이 길어서인지 아니면 내가 포기해서인지 나는 이미 말릴 의지도, 말려할 필요성도, 쥐어짜 내야 할 의욕마저도 바닥난 지 오래가 되어버렸다.
퇴원을 한다는 동생의 말에 서둘러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 진짜 퇴원해?"
"OO이가 코로나 병동 위험하다고 퇴원하재. 전염되면 어떡하냐고."
"의사도 퇴원 말린다면서. 그냥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고, 주치의가 퇴원하라고 하면 그때 하자. 엄마"
"아빠가 벌써 퇴원수속 끝내고, 짐 챙기러 올라갔어. OO이가 퇴원하라잖아. 나도 많이 좋아졌고 재활요양병원이 시설도 좋대. 거기다 OO대에서 운영하는 거라드라. 여기보다야 OO대가 더 좋지 않겠어? "
나의 의견은 들을 필요도 없었나 보다. 이미 퇴원은 결정된 뒤였고, 나에게는 통보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요양병원이 OO대인지 아닌지가 뭐가 중요하다는 것인지 엄마는 동생이 하자는 대로만 하겠다고 했다. 물론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던 그때는 옆사람이 재채기만 해도 예민해지던 그런 시기였으니 말이다.
나도 엄마의 병실옆에 코로나 병동이 배치된다는 사실은 싫었다. 혹시라도 코로나 전염되면 어쩌나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뇌경색이 더 무서웠다. 의사가 퇴원하란 것도 아니고 퇴원을 만류하는 상황에서 코로나 때문에 퇴원한다는 사실이 더 불안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엄마의 선택은 여전히 동생이었다. 딸의 의견보다 아들의 의견이 먼저였다. 누구를 위한 선택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아들이 한 선택이 중요할 뿐이었다. 아빠는 그 어떤 결정도 내리지 않았고 시키는 대로만 했다.
ATM기에서 5만 원권과 수표를 찾았다. 매번 현금으로만 드렸었는데 ATM기에 5만 원권과 1만 원권이 부족한지 수표로 출금되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엄마는 동생에게 이 돈을 전할 것이고 언제나 그랬듯 동생은 받은 적 없다고 시치미를 뗄 것이다. 그게 무엇이 중요할 까 싶었었다. 지금까지는.
병원비가 천만 원이 넘었다는 말에 마음이 급해져서 현금서비스도 받았다. 역시나 현금은 안 나오고 수표만 나왔다. 사진을 찍었다. 그 순간 왜 그랬는지 이유는 나도 모르겠다. 나는 엄마에게 모두 칠백만 원을 건넸고, 며칠 뒤 엄마로부터 동생에게 칠백만 원 전부를 전달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동생에게 알아보라던 산정특례는 그때는 생각조차 나지 않았었다.
계좌이체를 하지 왜 현금을 찾느냐는 질문을 많이 들었다. 계좌이체의 편리함이야 말해 무엇하랴마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부모님은 팔십이 넘으신 현재까지도 현금출금 카드를 만들어 본 적이 없다. 현금출금카드 만들면 도둑맞는 줄 아는 분들이고 겁이 난다고 현금출금기 사용은 시도조차 안 해보셨다. 키오스크 사용을 두려워하는 분들은 조금이라도 이해하실 수 있으려나?
은행에서 대기표를 뽑고 출금전표에 금액을 기재하고 도장을 찍어야만 현금을 찾는 분들이다. 계좌이체를 한다면 나는 편하고 좋겠지만 부모님은 불편한 노구의 몸을 이끌고 은행에 가서 이 모든 절차를 거쳐야지만 보내 드린 돈을 쓸 수 있는 사실을 잘 알기에 그저 한 푼이라도 편하게 쓰시라는 마음이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엄마는 요양병원으로 떠밀리듯 옮겨갔다.
소시오패스's 사회적 규칙이나 법, 직장이나 학교의 규칙을 무시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을 조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