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수백, 수천의 손해가 먼저였다.
동생이 장례식장에 도착하고 나서야 나는 부고장을 보낼 수 있었다. 상조회사 직원은 몇 개의 부고장 샘플들을 보여주었고 그중 하나를 골라 지인들과 회사에 소식을 알렸다. 핸드폰에 남아 있는 부고장 발송 시간은 1시 59분이었다.
12. 사라진 여섯 시간의 이유
사라졌던 아들이 나타나고 나서야 나는 엄마의 부고를 확정 지을 수 있었고, 엄마의 죽음을 세상에 알릴 수 있었다. 가부장적인 유교문화가 아직도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는 이 나라에서 딸은 부모님의 장례에 대해 결정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았다.
장자(長子)라는 상주(喪主)가 있는 한 딸은 상주가 될 수 없었다. 아들이 없으면 딸이 상주가 될 수도 있다지만 그마저도 결혼을 하면 남편(사위)이 상주를 맡는 경우가 여전하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상황에서 상주가 되겠다고 맞서기도 쉽지 않다. 여성이 상주를 볼 수밖에 없는 경우에도 이를 반대하는 고령 세대의 친인척들이 남아있고, 보편적으로 남자 상주(喪主)가 당연하다고 여기기 때문이기도 하다.
엄마의 화장(火葬)을 할 때도, 봉안당(奉安堂)을 결정할 때도 나는 그 어느 것도 결정하지 못했다.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심지어 화장장(火葬場)에서는 고인의 딸이라는 데도 나의 영수증 재발급 요청을 거절했다. 상주(喪主)가 아니라는 이유로. 화장장 직원은 매우 친절하게도 영수증이 필요하면 꼭 상주(喪主)를 통하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언제든지 몇 번이든 재발급은 가능하지만 상주(喪主)만이 가능했다.
장례를 치르는 동안 동생이 사라졌던 시간들에 대해서는 물어볼 생각 조차 하지 못했었다. 그저 나타났으니까 되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나타나서 다행이다 정도였다. 부고 문자를 보내자마자 조문객들이 오기 시작했고, 동생은 거나하게 술이 올라가고 있었다.
"엄마 새벽에 돌아가신 거라며? 왜 늦게 연락을 한 거야?"
"엄마 임종은 지킨 거야? 왜 돌아가신 거야?"
"아빠는 뭐 하느라 엄마 돌아가시는 줄도 몰랐대?"
왜 늦게 알렸는지 물어오는 친척들에게 동생은 대답을 피했고, 나나 남편은 굳이 동생이 사라져서 알리지 못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경황이 없어서 수습하느라 생각을 못했다고만 했다.
OECD 자살률 1위, 가부장적 유교적인 우리나라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한 사람들에 대한 시선은 여전히 곱지 않다. 나는 엄마의 선택을 이해할 수 없다.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려고 노력 중이었다. 하지만 그런 엄마를 남들의 수군거림 속에 가시게 하기도 싫었다. 절뚝거리는 모습조차 보이고 싶어 하지 않아 하던 엄마였다.
우리는 엄마의 선택을 미리 막지 못했다는 자책과 후회를 안고 앞으로를 살아가야 한다. 아빠는 우리보다 더 심한 후회와 자책으로 힘드실지 모른다. 엄마가 돌아가신 그 집에서 앞으로의 생을 홀로 살아가셔야 할 아빠에게 배우자의 자살이라는 수군거림까지 듣게 하기도 싫었다. 우리는 엄마가 스스로 생을 마감하신 사실을 감추고 그저 새벽에 뇌출혈 후유증으로 넘어지셨고 그래서 돌아가신 것으로 말을 맞췄다.
집에서 돌아가시게 되면 형사 조사가 필수라고 한다. 단순 사고사로 처리되면 부검이 필요 없지만 혈흔이 있다면 부검이 필수라고 하니, 그 이유만으로도 엄마의 부검은 설명이 가능했다.
형사에게 비밀로 해줄 것을 부탁했다. 형사가 남의 가정사를 떠벌릴 이유야 없다지만 모르는 일이다. 사돈의 팔촌의 건너 건너도 알 수도 있는 게 대한민국의 인맥이다. 다행히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 아무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내가 스스로 알리기 전까지는.
조문객은 정신없이 몰아쳤고 왜 늦었는지, 어디 갔다 왔는지 동생과 따지고 들 여유도 없었다. 조문객이 휘몰아치듯 휩쓸려 나가고 밤 12시가 넘었는데도 동생의 조문객은 돌아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끊임없이 술을 마시고, 왁자지껄하게 떠들고 있었다. 얼핏 보면 신나는 회식자리 같았다. 조용히 슬퍼하고 싶었던 나는 그들로 인해 슬픔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마음껏 울지도 못했다. 그저 저들이 빨리 돌아가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코로나 시절, 조용한 조문문화가 정착되었다고 하는데 동생에게는 남의 나라 이야기일 뿐인가 보다.
멍하니 말갛게 웃는 엄마의 영정사진을 보고 있던, 그때였다. 동생의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가 돌아가셨는데 오늘 마무리해야 될 공사 생각이 나는 거야."
"내가 없으면 수천, 수백의 손해가 날지도 모르겠는데, 어쩔 수 없더라고."
"현장마다 다니면서 정리하고, 오느라고 늦었지, 뭐."
너무 놀라 쳐다봤지만 동생은 내 시선을 의식하지 못한 채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이다.
"의사들이 그러는데 뇌출혈은 1차가 끝이 아니고 2차 3차 계속 생긴다는 거야."
"몸이 자꾸 떨린다고 했는데 2차 뇌경색 온 거 아닌가 싶더라고"
"한 달 동안 병원비가 천만 원이 넘었어. 병원비에 간병비까지. 어마어마해."
"이사하려고 집을 보러 갔는데 창문 밖으로 바다가 보이는 거야.
"OO엄마가 사람은 이런 집에서 살아야지 하는데, 그때 이 집이다 했지."
어떻게 돌아가신 엄마를 앞에 두고 수천, 수백의 손해이야기를 할 수 있지? 엄마를 앞에 두고 엄마의 목숨과 자신의 손해를 계산을 했다고? 스스로 돌아가신 엄마보다 수천, 수백의 돈을 택했다고 재는 어떻게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할 수 있지?
어떤 이야기도 더 듣고 싶지 않았음에도 계속해서 들려왔다. 수많은 이야기를 떠들어댔다. 스스로 생을 마감한 엄마를 앞에 둔 그 찰나의 순간에 자신의 손해가 먼저였다는 사실이 슬플 뿐이었다. 엄마 말은 맞았다. 엄마가 평생 짝사랑했던 아들의 민낯은 죽기 전 엄마의 말씀대로 엄마보다 돈이 먼저였다.
이어폰을 끼고 잠을 청했다.
사람은 죽으면 49일 동안 구천을 돌아다니면서 재판을 받고 이승을 떠돈다고 불교신자는 믿는다. 영화 신과 함께만 봐도 잘 나온다. 엄마의 넋이 제발 이곳에 오지 않기를, 동생의 저 이야기를 듣지 않기를 진심으로 빌고 또 빌었다. 엄마가 더이상 상처받기를 원하지 않았다.
소시오패스' s 사람의 목숨을 돈으로 환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