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리모에게,
네 본명이 ‘리모트 컨트롤러’라는 거, 기억하고 있니? 요즘 사람들은 너를 그냥 ‘리모콘’이라고 부르지만, 그 이름은 사실 일본식이야. 너는 미국에서 태어나 1970년대에 우리나라로 입양된 후, 우리 집에 큰 변화를 가져왔지. 그냥 TV만 조종하는 작은 기계가 아니라 우리의 라이프스타일을 바꿔놓은 트렌드 셋터였어.
TV 채널을 돌리고 싶을 때, 광고를 빨리 넘기고 싶을 때, 또는 그냥 몸을 움직이기 싫을 때, 너는 언제나 나의 ‘아바타’였어.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세상이 내 뜻대로 움직였지. 너의 친구들도 우리 집 곳곳에 있어. 에어컨 리모, 차 리모, 오디오 리모.. 심지어 공장에도 너의 친척들이 꽤 많더라구. 하지만 그들에 비하면 너의 위상은 낮은 편이지.
솔직히 말하면, 너로 인해 내가 게을러졌다고 생각한 적도 있어. 너만 손에 쥐면 세상이 다 돌아가니까, 몸을 덜 쓰게 되었거든.
내게 그런 핑계를 대지마
입장 바꿔 생각을 해봐 니가 지금 나라면은
넌 웃을 수있니 - 김건모, <핑계>
맞아. 그건 핑계였어. 너는 너의 역할에 충실했을 뿐이야. 나를 게으르게 만든 건 너의 편리함이 아니라, 나의 선택이었지.
평소에 나는 너를 함부로 대했어. 아무 데나 던져놓고, 소파 밑에 밀어 넣기도 하고, 심지어 손에 들고도 어디에 있는지 헤맬 때가 있었어. 너를 낭떠러지에서 떨어뜨린 적도 있네. 그때 많이 아팠을 거야.
얼마 전, 네가 반응하지 않았을 때도 나는 너에게 뭐라 했지. 배고파서 힘들어했던 너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없이 그냥 짜증만 부렸어. 정말 미안해.
그리고 또 하나 깨달은 게 있어. 너를 필요할 때만 찾고, 네게 지시만 내리는 돼지들처럼 행동했어.
돼지들은 일하지 않고, 다른 동물들을 지시하고 감독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뛰어난 지식이 있기 때문에 지도자의 역할을 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겼다.
- 조지오웰, <동물농장>
TV를 보지 않을 때는 너에게 아무런 관심조차 두지 않았고, 요즘은 OTT와 스마트폰에 빠져 너의 존재마저 잊고 있었지. 너의 자리를 대신하는 새로운 것들이 생길 때마다, 너는 점점 소외감을 느꼈을 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언제나 내 곁에 있어 주었어.
이제야 깨달았어. 앞으로는 너를 소중히 다룰게. 아무 데나 던지지 않고, 떨어뜨리지 않으며, 너만의 자리를 마련해 줄게. 그리고 더 이상 내 게으름을 너에게 탓하지 않겠어. 너는 내게 편리함을 주었을 뿐, 게으름을 선택한 건 나였으니까.
나의 소중한 리모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을 담아.
PS) 나는 지금껏 나의 잘못을 남에게 돌리거나 책임을 회피하지 않았는지? 필요할 때만 상대방을 찾고 도움을 요구하지 않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