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이틀하고 말 것 아니잖아요.
나보다 나이가 많은 나의 아랫동서는 작년에 평생 다니던 직장을 정년 퇴임했다.
동서는 정년이 없는 내가 부럽다지만 처제랑 여행도 다니고 취미생활도 하는 등 여유로운 인생 2막의 삶을 누리는 동서가 부럽기만 하다.
마님은 우리가 아직 노후 대비가 안 되어 있다면서 75세까지는 일을 하란다.
한 마디로 손 떨릴 때까지 평생 일하라는 소리다.
비록 많은 돈을 벌지는 못했지만 큰 사고 없이 자식들 키우며 건강하게 지금까지 치과를 운영해 올 수 있음은 감사한 일이다.
하지만 평생 치과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환자들의 좁은 입 안만 들여다보고 살아온 나로서는 넓은 세상을 여행도 다니며 한가로이 쉴 수 있는 여유가 아쉽다.
현실에서는 이러한 여유는 고사하고 지난달엔 등에 난 종기를 제 때 치료하지 않고 키웠다가 기어이 큰 병원에서 수술을 한 사단이 났다.
매일 하는 소독조차 치과 진료 시간에 지장 없게 자투리 시간으로 예약을 잡느라 애를 먹었다.
휴진 때문에 불평하고 돌아설 한 사람의 환자라도 잃지 않으려는 속 좁은 욕심을 내려놓지 못한 탓이다.
좁은 입 안에서 더 좁은 치아를 파고 마이크론 단위로 수복물의 정밀도를 맞추어야 하다 보니 시야도 마음도 밴댕이 속처럼 졸아들었나 보다.
개원의들은 자영업자다.
시간을 기회비용으로 계산하니 하루 쉬면 돈이 얼만데 라는 생각에 며칠 씩 문닫고 여행을 가거나 맘 편히 쉬지를 못한다.
우리는 대개 업무의 성취나 경제적인 성과를 이루어야만 비로소 쉴 수 있다는 생각에 번아웃이 오도록 자신을 몰아부치게 된다.
사람도 동물인 이상 생물학적으로 잘 쉬어야 오히려 더 창조적인 성과를 낼 수 있는데 이게 순서가 바뀐 것이다.
휴진하는 병원을 돈 좀 벌었다고 배가 불렀나보네 하며 고까운 눈으로 볼 일이 아니다.
내 몸을 맡긴 의사가 피곤에 쩔어 황폐한 정신과 육체로 자신을 치료한다면 얼마나 불안하겠나.
'세미나 관계로 휴진 중'이란 거짓말보다 '며칠만 재충전하고 오겠습니다'라고 솔직히 고백할 용기가 필요하다.
아무리 각박한 사회라 해도 솔직하게 호소하는 사정에는 기다려 주는 여유와 배려가 늘 있기 마련이다.
십여 년 전 보름 간의 유럽 여행을 고민하던 때 '원장님도 이제 머리 좀 식히시고 쉬셔야지요' 하며 이해해 주신 환자분들 때문에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이웃사촌인 아파트 옆집 엄마는 우리를 형부와 언니라 부르면서 고민도 곧잘 토로하곤 한다.
남편이 불의의 교통사고로 오랫동안 병원 생활을 하는 바람에 경제적 어려움을 겪다가 애들 엄마가 얼마 전부터 경험도 없이 빵집을 운영해오고 있다.
주변의 경쟁도 심하고 입지도 썩 좋지 못해 고전하지만 좋은 재료와 하루 지난 빵은 폐기하는 신선함을 고수해 단골도 생기고 자리를 잡아가는 중이다.
그런데 트럼펫 전공으로 예고에 다니던 그 집 둘째 아들이 쟁쟁한 선배들을 제치고 미국에서 열리는 콩쿠르에 한국 대표로 참가하게 되었다.
자랑스러운 일이긴 한데 아직 아이가 어려 엄마가 대회 기간 동안 체류해서 케어해 주어야 할 처지였다.
이제 겨우 자리 잡으려는 빵집을 한 동안 문을 닫아야만 하는 난감한 상황이었다.
나는 그런 걱정일랑 말고 맘 편히 잘 다녀오시라고 용기를 드렸다.
대신 사정상 휴업한다는 쪽지만 달랑 써 붙여 놓지 말고 아이의 사진을 대회의 포스터와 함께 편집하고 출력해서 가게에 대문짝만 하게 붙이라고 했다.
우리 아이가 한국 대표로 참가하게 되어 부득이 함께 미국에 다녀오겠으니 응원해 주시고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내용을 고객들에게 솔직하게 알리라고 했다.
좋은 예는 아니지만, 최근 SNS에 불륜녀와 바람이 나 해외로 도피한 남편 때문에 '내 이 연놈들을 조지러 부득이 가게문을 잠시 닫으니 이해 바란다'는 문구를 써 붙이고 간 분식집 여사장의 사연이 생각나서였다.
분식집 손님들은 많은 관심과 응원의 댓글을 달았고 다시 돌아왔을 때 가게가 이전보다 더 잘 되었다고 한다.
요즘은 굳이 드라마나 영화만이 아니라 평범한 개인사조차 충분히 콘텐츠가 되는 세상이다.
속상한 일, 자랑스러운 일, 부득이한 사정을 진솔하게 알리고 호소하면 충분히 이해받을 수 있고 때에 따라선 관심과 응원도 받을 수 있다.
장기판에 훈수 두는 사람처럼 나는 남의 고민엔 오지랖 넓게 조언을 하면서 어찌 자기 앞가림은 못 하는지 모르겠다.
치과 격언에 '평생 볼 환자 수는 정해져 있다'는 말이 있다.
젊어서부터 물불 안 가리고 환자를 많이 보다 보면 나이 들어서 필시 병이 나거나 일찍 죽어서 더 이상 환자를 볼 수 없다는 뜻이다.
하루 이틀하고 말 일이 아닌 이상 욕심은 좀 내려놓고 긴 호흡으로 여유롭게 완급 조절을 해나가야 건강하게 오래 유지할 수 있다.
이제 막 개원한 신규 개원의와 오랜 세월 텃밭을 유지해 온 원로가 같은 조건에서 경쟁하는 것은 공평하지 못하다.
원로가 되어 신규와 경쟁하겠다고 아둥바둥하며 저가의 가격 경쟁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반면 젊은 치의 중에서도 개원 환경이 녹록지 않고 치전원 출신 등으로 늦게 졸업한 경우에는 본전 생각에 무리하게 한 몫 당기겠다는 발상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 듯하다.
마케팅을 빌미로 SNS에 무차별적 광고 공세를 퍼부어 이벤트성 할인과 덤핑으로 유혹하고 과잉 진료와 먹튀를 일삼는다.
이들은 소속회에 가입하지도 않고 질서를 지키는 대다수 선량한 동료들의 선의를 역이용한다.
박리하면 다매해야 할 수밖에 없는데 왜 그렇게 무리하게 환자들과 다른 동료들에게까지 피해를 입히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미세한 질병도 놓치지 않는 예리한 시선도 필요하지만 좀 더 멀리 넓게 볼 줄도 아는 혜안을 갖추어야 한다.
옹졸하지 않게 대범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여유 있게 정년 없는 치과의사의 삶을 살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