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두 번 결혼식을 했습니다.
올여름은 유난히 길고 무덥다.
지난 주말에도 더위에 허덕이다가,
"오늘도 엄청 더운데 중국 냉면 먹으러 갈래?"
"콜!"
우리 부부는 냉면 먹으러 부산엘 간다. 차이나타운의 중국식 냉면 먹으러.
나는 아내와 연애하던 시절 아미동 대학병원에 다니던 본과생이라 가까운 남포동과 국제시장 일대가 우리의 주 데이트 코스였다.
결혼하고 30여 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그 코스를 그대로 다니며 연애를 하고 있다.
세월이 흘렀어도 워낙 자주 다녀서인지 그 일대가 그리 크게 변한 줄을 모르겠다.
당시 들리던 커피숍들은 다 없어졌지만, 그때 즐겨 먹었던 할매국수집, 순두부집, 종각집, 완당집 등등 오래된 노포들은 지금도 여전히 건재하다. 깡통시장에서부터 보수동 책방골목, 남포동 일대와 자갈치 시장에 이르기까지 구석구석 골목마다 훤하게 꿰고 있어 울산 시내보다 더 자주 가게 된다.
노포식당에서 추억의 식사를 하고도 길거리 음식으로 군것질까지 해가며 애들처럼 손잡고 마냥 쏘다닌다.
가는 곳마다 자주 가는 단골가게들이 있어 살갑게 맞이해 주고 속옷이나 양말 등 저렴한 쇼핑을 풍족하게 한다.
여름철에는 그 부산 나들이의 첫 코스를 차이나타운의 중국식 냉면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나는 음식을 가리지 않는 편이긴 하지만 오향장육 향이 강해 일반 냉면보다는 별로인데 평소 냉면을 썩 즐기지 않는 마님이 그 집 중국식 냉면만은 국물까지 싹싹 비울만큼 좋아하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울산에도 중식 냉면을 하는 집이 많지만 맛이 다르다고 꼭 그 집만을 고집한다.
그 집 냉면을 먹어야만 비로소 여름이 시작도 되고 끝나기도 한단다.
"대체 언제부터 중국식 냉면을 좋아하게 됐어?"
"기억 안 나? 결혼 전에 우리 둘 다 그때 처음 먹었잖아."
"아~! 그날..."
본과 3학년 때 아내를 처음 만나고 졸업할 때까지 우리는 예쁘게 사랑을 키워갔다.
당시 나는 찢어지게 가난한 집의 장남이었고 여자친구는 그냥 평범한 집의 장녀였다.
우리 집은 왕년에 잘 나가다가 부도로 사업이 망해 경매로 집이 넘어가고 부모님도 이혼하셔서 어머니 없이 남은 식구들이 단칸방을 전전하던 때였다.
나보다 먼저 대학을 졸업한 그녀는 취업을 해서 번 돈으로 가난한 고학생인 애인을 뒷바라지했다.
원내생으로 임상실습과 피 말리는 국시공부를 목전에 두었던 나는 집에도 가지 않고 침낭 하나로 학교에서 새우잠을 자며 독립군 생활을 하던 때라 데이트하는 날이 내게는 잔칫날이었다.
천사 같은 그녀는 멀리 울산에서 부산까지 찾아와 나를 먹이고 입히고 용돈까지 줬다.
아름다운 그녀의 존재만으로도 행복한데 그런 과분한 사랑을 염치도 없이 넙죽 잘도 받기만 했다.
마침내 국시 합격도 하고 졸업 후 어엿한 치과의사가 되어 무의촌 보건지소에서 공중보건의로 근무하게 되었다.
관사도 나오고 얼마 안 되지만 월급도 나오기에 고맙게 기다려 준 그녀와 결혼을 미룰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우리 부모님의 거센 반대에 부딪혔다.
사사건건 의견 대립하며 다투다 이혼까지 하신 분들이지만 내 결혼 문제에 대해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이시는 거다.
아직 서두를 것 없다고 말씀하시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이미 몇 군데서 중매가 들어오고 있음을.
극장집 딸, 금은방집 딸, 사장집 딸..
내가 어렴풋이 들은 것만도 그 정도인데 얼마나 많은 유혹들이 있었을까.
정말 이러다가 애인을 배신하고 데릴사위로 팔려가는 뻔한 영화 주인공이 될 판이다.
아버지는 우릴 불러 꿇어 앉혀 놓으시고 대뜸 그녀에게,
"너는 결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니? 결혼의 정의를 내려봐라." 하시는 거다.
인류 유사 이래로 너무나 어려운 화두인지라 당시에 무어라 답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꿇어앉아 숨도 못 쉬고 있던 그녀가 답하기엔 참으로 난감한 질문이었을 거다.
그렇게 행복하기만 했던 우리의 사랑은 부모님의 반대로 큰 시련을 겪게 되었다.
온갖 호소와 설득에도 안 통하니,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우리는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성인이었다.
각자 가장 믿을만한 친구를 증인으로 세워 나의 본적지인 부산 동구청에 가서 혼인신고를 감행하였다.
비록 사실혼 관계는 아니지만 이제 우리는 법적으로는 엄연한 부부가 되었다.
호적상 이미 유부남인 나를 이젠 어느 인간시장엔들 내놓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렇게 눈물로 부부가 된 그날의 하늘은 서럽도록 맑았고 초여름의 날씨는 무더웠다.
그날 구청에서 내려오다가 들른 중국집에서 먹었던 음식이 중국식 냉면이었다.
아내는 그때의 그 맛을 잊을 수가 없다고 한다.
아내가 지금까지 그 집 냉면을 즐겨 찾는 이유를 알게 되니 가슴이 짠하다.
그렇게 우리는 법적 부부가 되었고 성당에서 혼배미사를 보았다.
나의 부모님이 불참하신 반쪽짜리였지만 이 역시도 엄연한 결혼식인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자궁외 임신이 되었고 급기야 난관이 터지는 절체절명의 순간이 오고야 말았다.
침대에 실려 응급수술을 들어가는 그녀의 손을 잡고 울면서 나는 말했다.
니가 죽으면 나도 같이 확 따라 죽어 버리겠다고.
못난 나를 위해 헌신한 그녀에게 이런 고통을 줄 수는 없다.
내 여자는 내가 끝까지 책임지고 지킨다.
그렇게 울면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나의 과감한 결단과 굳은 의지에 나의 부모님이 마침내 허락을 하셨다.
우리는 예식장에서 정식으로 많은 이들의 축복 속에 한 번 더 결혼식을 올렸다.
우여곡절 끝에 어렵사리 결혼한 우리는 그래서 더 애틋하고 온 세상을 다 가진 양 행복했다.
빠듯한 살림이었지만 아끼고 쪼개어 융자도 갚고 동생들 학비도 대면서 장남과 맏며느리로서 최선을 다하고자 했다.
큰 아픔과 상처를 준 내 소중한 사람이기에 평생토록 갚으며 살아갈 거다.
지금도 잠자리에서 눈뜨면 보이는 아내의 모습이 실감이 나지 않아 가만히 쓰다듬어 본다.
자는지 깼는지 눈도 뜨지 않은 채로 배시시 웃는 아내의 모습이 오늘따라 너무도 사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