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로망은요
나는 아내랑 노는 게 재미있다.
술도 집에서 아내랑 마시는 게 더 맛있다.
회장도 물러나고 이제 끈 떨어져 어디 불러주는데도 없지만 간혹 나가더라도 1차만 간단히 하고 서둘러 집에 오기 바쁘다.
이러다 술친구 다 떨어질 판이지만 아무렴 상관없다.
아내와의 소확행이 더 중요하니까.
주말엔 아내랑 여행을 다닌다.
신혼 때부터 전국 방방곡곡을 누볐고 아이들이 생기고부터는 교육을 빙자해 박물관, 미술관 등 문화유적 답사로 이어졌다.
이제 다들 장성해 곁을 떠났지만 그 시절 아이들과 함께 다녔던 곳들을 다시 찾아다니며 추억 여행을 하고 있다.
신혼 생활을 했던 통영시와 결혼 전 데이트하던 부산 국제시장 일원은 지금도 아내랑 손잡고 돌아다닌다.
캠핑도 자주 간다.
아내가 나보다 더 캠핑광이라 다행히 외로운 솔캠(Solo Camping)만은 면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집에서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 사람이 캠핑장에서는 집짓기(텐트피칭)와 요리, 설거지는 물론이고 장작불 피우는 머슴역을 자처해 마님 모시듯 하니 마치 소꿉놀이하듯 재밌나 보다.
그 나이에는 럭셔리한 안락함을 찾기 마련인데 소박한 즐거움을 아는 아내가 참 좋다.
아내는 나보고 특이한 남자라고 하지만 나는 아내랑 마트에 가는 게 신난다.
마치 어렸을 때 엄마 치맛자락 붙잡고 시장 따라다니던 느낌이다.
맛있는 것, 먹고 싶은 것을 사고도 군것질하듯 시식 코너를 줄 서서 챙긴다.
그러다보니 자주 아내를 놓치고 잃어버린다.
그래도 아랑곳하지않고 어슬렁거리니 직원이 묻는다.
"손님, 뭐 찾으시는 거 있으세요?"
"예. 우리 마누라요."
마트에서 유독 자주 마주쳐 서로 신기해하는 치과의사 선배님이 계신데 그분도 어지간히 가정적이신 것 같다.
최근에는 혼자 마트에 오셨기에 여쭤봤더니 부인이 대학 간 막내를 따라가는 바람에 주중엔 기러기 생활을 하신단다.
혼자 지내니 홀가분하고 좋다고 하시는데 돌아서는 선배님의 둥근 어깨가 쓸쓸해 보인다.
나는 두 딸들을 고등학교 때부터 미국에 유학시켰어도 기러기가 된 적이 없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아내가 내 곁을 떠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여행을 가지 않을 때면 주말에 아내랑 집에서 영화를 본다.
거실에 빔 프로젝터와 전동 스크린으로 홈씨어터를 설치해 놨다.
최신 영화보다도 대개 예전 TV에서 보던 주말의 명화들을 즐겨본다.
국제시장 단골집의 먼지 속에서 찾아낸 보석 같은 옛 DVD영화들이 수십 편이 있다.
알랑드롱 주연의 '태양은 가득히', 앤서니퀸의 '길(젤소미나)', 소피아로렌의 '해바라기' 같은 명작들은 지금 봐도 감동적이다.
외화뿐만 아니라 강석우의 쓸쓸한 눈빛이 인상적인 '겨울나그네', 일본 소설 원작의 '빙점', 고혹적으로 담배 피우는 모습이 압권인 장미희의 '깊고 푸른 밤' 등등 옛날 한국영화들도 우리의 젊은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명작들이다.
가끔 나는 처음 보는 영화들을 아내는 대부분 다 봤다길래 대체 어느 놈이랑 보러 다녔냐고 시비를 좀 걸었더니, 당신이 밤늦게 술 처먹고 늦게 들어올 때마다 기다리며 혼자 봤던 영화라는데 할 말이 없다.
우리가 젊었을 때 아내는 피아노를 치고 나는 기타를 치며 노래도 곧잘 부르곤 했다.
신혼 때 통영의 바닷가 방파제를 손잡고 거닐며 아내에게 트로트를 가르쳐줬고, 아내는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내게 찬양성가를 가르쳐 줬다.
아이들과는 노래방에 가서 신나게 잘도 놀았다.
그러던 아내가 지금은 노래방을 안 가려고 한다.
갑상선암 수술을 하고부터다.
착한 암이라고는 하지만 얼마나 무섭고 외로웠을까.
더구나 끔찍한 흉터를 여인의 목선에 평생 낙인처럼 지녀야 했으니 그 아픔 또한 어떠했으랴.
그 후로 아내는 일상적인 대화는 가능하지만 높은 음정을 내지 못했다.
음정이 불안하니 박자도 놓치고 갑자기 음치가 됐다.
노래방에 갔다가 사정도 모르는 친구들에게 트라우마를 받았나 보다.
그 후로 노래방에 가는 걸 싫어한다.
아내의 수술 자국은 배 한복판에도 있다.
첫 아이를 자궁 외 임신으로 잃었을 때의 상처다.
오랜 세월 깊은 주름과 맞바꿨지만 나이 들어가는 모습이 여전히 내 마음을 아프게 한다.
내 늙는 거야 상관없지만 마누라 귀밑머리 새치는 도저히 못 보겠다.
늘상 염색 좀 하라고 잔소리를 하게 된다.
아내는 갱년기도 유별나게 겪는 중이다.
사시사철 덥다고 부채질을 하고 밤에는 불면증에 시달린다.
체질도 변했는지 평생 안 하던 두드러기로 고생을 하는가 하면 걸핏하면 가구 모서리나 문짝 등에 찍히고 다쳐서 걱정이다.
나이 들어 근육이 약해져서 그러나 싶어 걷기 외에 자전거 타기 같은 강도 높은 운동을 해보자고 했더니 처녀막 터진다는 핑계를 대며 요리조리 피한다.
어떻게든 아내가 좀 더 활기차고 건강해져서 남은 평생 나랑 재밌게 놀아줬으면 좋겠다.
오늘도 퇴근하고 집에 들어서니 아내가 달려 나와 반갑게 꼭 안아준다.
다리 하나를 나한테 척 감고는 귀에다 뜨거운 숨을 내뿜으며 묻는다.
"종일 내 안 보고 싶드나?"
"말도 마라. 미치는 줄 알았데이."
옆에서 다 큰 아들이 보든 말든 닭살 애정 행각을 벌인다.
내게도 불알친구들은 있지만 아마도 내가 죽으면 가장 슬퍼하고 마지막까지 남을 친구는 마누라이지 싶다.
내 로망은 마누라 품에서 죽는 거다.
아내는 내 인생의 소풍에 끝까지 함께 하고 싶은 친구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