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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 보내는 경고

그만 올라와. 산으로

by 허용수

옛날에 나는 고교 평준화 조치로 추첨에 의해 고등학교를 배정받았다.

학군 내에 전통을 자랑하는 쟁쟁한 명문고들도 많았지만 내게 배정된 학교는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한 낯선 학교였다.

그해 처음 개교한 신설학교였기 때문이다.

입학식 날 안내지도를 보고 찾아 나서니 자꾸만 산으로 가라 한다.

마침내 학교 앞 100미터 표지판이 보이는데 학교 건물은 보이지 않고 웬 터널 같은 굴다리가 나타난다.

그리고 그위로는 도시고속도로 건설 공사가 한창이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처럼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부신 설국이 나타나는 게 아니라 산허리가 움푹 잘려나간 광활한 채석장이 펼쳐다.

거대한 바위를 자갈로 만드는 돌 깨는 기계의 요란한 소음과 돌가루가 날리는 그 황량한 풍경 한 귀퉁이에 5층짜리 학교 건물이 대략 1/3만 지어진 채 서 있다.

나머지 2/3의 건설을 예견하는 듯 건물벽엔 철근들이 삐져나와 있고 장차 교사가 들어설 땅이 우리의 임시 운동장이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운동장이라 불리는 공터 옆에 작은 절 하나가 우뚝 버티고 서 있는 것이었다.

아마 학교 측과 보상 협상이 결렬된 모양인데, 절 입장에서도 설마 이런 산속에까지 학교가 들어서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으리라.

돌 공사장에 짓다만 학교 건물과 절집의 서로 어울리지 않는 이상한 풍경 속에서 불안과 원망 섞인 입학식을 치러야 했다.


우리 1회들은 공사장의 백색소음 속에서 공부를 해야 했고 체육시간이면 리어카를 끌고 학교 부지 정리 공사에 투입되었다.

그렇게 이듬해 2회를, 그다음 해 3회를 받으며 건물은 그만큼씩 완공되어 갔고 마침내 모든 학년을 채웠을 때 마치 우리 손으로 학교를 지은 듯한 자부심에 뿌듯해했다.


우리 학교는 천도교 종교단체가 세운 종립학교였다.

천도교는 구한말 전봉준의 동학농민운동의 사상적 모태가 된 민족종교이다.

그렇게 심하게 강요하진 않았지만 기독교 미션스쿨처럼 운동장에서 예배 형식의 아침 조회를 진행했고 종교 수업시간도 있었다.

예배 조회 때는 찬송가와 불경처럼 천도교 노래와 기도문을 낭송했다.

그럴 때마다 곁에 있는 절에서 목탁소리와 스님의 청아한 독경소리가 유독 크게 운동장에 울려 퍼진다.

경건해야 할 예배시간에 두 종교의 기도소리가 콜라보로 울리는 웃지 못할 상황이 연출된다.


졸업한 지 40여 년이 훌쩍 지난 지금은 강당과 체육관 등 부속 건물들도 더 지어졌고 우레탄 트랙이 깔린 운동장 등 현대식 시설의 완비를 자랑한다.

하지만 절은 아직도 그 자리에 건재해 그곳이 깊은 산 속이었음을 해주고 있는 듯하다.

우리가 다녔던 그 시절의 학교 시설은 미비하고 어수선했지만 울타리와 경계가 없는 산 속이라 점심시간이면 산과 들의 풀밭에 드러누워 하늘에 떠 가는 구름이며 이름 모를 들꽃과 산들바람을 느낄 수 있었다.

교실 창밖에는 고라니가 뛰놀고, 간혹 아침에 등교했더니 책상 서랍 속에 뱀이 또아리를 틀고 앉아 있더라는 믿거나 말거나 하는 얘기도 심심찮게 있었다.

학교가 산으로 가는 바람에 자연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 집은 산 중턱에 있는 고층아파트다.

내가 기억하는 우리 아파트의 TV광고 장면은 맑은 개울물이 흐르는 숲 속에 노루가 뛰어다는 모습이었다.

실제 흐르는 개울물은 없지만 산속 작은 연못이 있고, 이사 온 얼마 후 아침에 산에 오르다 등산로에서 뱀도 보았다.

산새소리에 아침을 깨고, 다람쥐, 청설모에 '멧돼지 주의' 현수막도 붙어 있는 산 속이다.

도시의 소음과 공해에서 벗어나 숲의 향기와 자연을 누릴 수 있어 좋긴 하지만 어쩌다가 아파트 단지가 이런 깊은 산속까지 올라오게 되었나 싶다.

도심 재개발 사업비보다 차라리 산을 깎는 개발비가 적게 드는 모양이다.


내가 처음 이사 왔던 10여 년 전만 해도 일대엔 우리 아파트뿐이라 공기도 좋고 시야도 사방이 탁 트였는데, 지금은 주변에 온통 아파트 단지들이 우후죽순 들어서서 이곳도 아주 혼잡해졌다.

그러다 보니 접근성을 좋게 하고자 산에 터널을 뚫었고 산 중턱까지 대중교통으로 마을버스가 다닌다.

새소리 울려 퍼지던 산속에 종일 차 지나는 소음과 매연이 침범해 오고 있다.


주 초반엔 눈발이 날리다가도 주말엔 초여름의 날씨를 보이는 등 한 주일 동안 4계절이 다 나오는 이상기온 현상이 나타난다.

그러니 개화시기가 조금씩 다른 동백, 매화, 목련, 진달래, 개나리, 벚꽃까지 다양한 봄꽃들이 동시다발로 봄이 왔음을 다투어 알리고 있다.

하지만 산길엔 아직도 바짝 마른 낙엽들이 수북이 쌓여있고 건조한 날씨가 이어지고 있다.

최근 전국적으로 유래가 없는 대형 산불의 기세가 강풍을 타고 수그러들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

경북 의성, 경남 산청에 이어 내가 사는 근처 울주. 온양 지역에까지 대형 산불이 발생해 많은 희생자와 이재민을 내고 있다.

우리 아파트도 산속에 있으니 덜컥 겁이 난다.

여차하면 신속히 피난할 수 있도록 중요품을 미리 챙겨두었다.

대형 산불은 실화가 원인이기도 하지만 자연이 주는 경고로 보인다.

개발을 핑계로 더 이상 산으로 올라오지 말라고.


인간의 무분별한 개발로 지구 온난화가 가속되어 빙하가 녹고 해수면이 상승하고 산불로 산림이 황폐해진들 지구가 쪼개지거나 폭발할리 없다.

노아의 대홍수가 일어나든, 공룡을 멸종시킨 빙하기가 도래하든 지구는 지구상 생물들을 깡그리 싹 다 갈아엎어 멸종시키고 다시 아메바 같은 원시 생물부터 리셋하면 그만이다.

인간만이 자기가 살기 위해 부르짖는 환경보호조차 각자의 이기심 때문에 실천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반복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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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