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 전가하기 좋은 시대
복잡하고 다변화된 현대사회는 점점 각각의 전문분야로 세분화되어가고 있다.
의사만 해도 그 자체로서 이미 전문직인데 내과, 외과, 산부인과, 안과, 이비인후과 등등 전문의들로 다시 나뉜다.
현재는 이들 메이저 과목들도 외과에서는 정형외과, 신경외과, 흉부외과, 성형외과 등으로, 내과 역시 순환기내과, 소화기내과, 내분비과, 혈액종양내과 하는 식으로 끝도 없이 잘게 나뉜다.
치과 역시도 보철과, 치주과, 교정과, 구강내과, 구강외과, 소아치과, 보존과, 통합치의학과 등으로 전문의 시대가 되었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한의원과 동물병원에서도 진료과목들을 나열하고 있는 걸 보면 역시나 전문분야로 세분화되어 있는 것 같다.
이렇게 분야를 전문화하고 세분화하다 보니 가끔 영역이 겹치면서 서로 자기네가 전문이라고 주장하며 충돌하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일례로 양악수술은 치과인 구강외과와 의과인 성형외과가 서로 영역 다툼을 하는 분야다.
오래전 부산의 모 대학병원에서 벌어졌던 수련의들 사이의 각목 난투사건은 이 같은 갈등이 표면화된 유명한 사건이다.
그때 구강외과 수련의들이 많이 맞았다고 하는데, 치과의사인 내 생각에는 상. 하 치아간 교합을 정확히 맞추어 줄 수 있는 구강외과 의사가 수술하는 것이 맞을 것 같지만 겁이 나서 더는 말을 못 하겠다.
성형외과와 치과의 영역 갈등은 안면부의 쁘띠성형에도 나타난다.
쁘띠성형이란 수술을 하지 않고 보톡스나 필러 등을 주사하여 주름 개선과 안면 성형 효과를 내는 치료법을 말한다.
밤에 잘 때 이갈이를 하거나 과도한 교합력이 가해지면 치아가 파절되거나 마모 되는 경우가 흔하다.
치과에서는 이런 증상의 완화를 위해 씹는 근육인 교근의 힘을 줄여 줄 치료 목적으로 보톡스를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기능적인 목적에 더해 교근이 위축되어, 흔히 말하는 '사각턱'이 'V 라인'으로 갸름하게 개선되는 성형효과까지 부수적으로 얻을 수 있다.
실제 구강외과의 정식 명칭은 '구강악안면외과'이니 구강뿐 아니라 얼굴과 턱까지가 다 영역에 포함된다.
그래서 이마주름, 미간주름, 눈가주름, 팔자주름과 같은 안면부에도 보톡스 치료를 하게 되는데 이 때문에 성형외과와 부딪히게 되는 것이다.
언젠가 중학교 남학생이 자전거를 타다가 얼굴을 심하게 다쳐 치과에 내원한 적이 있었다.
입술이 찢어지고 입 주변의 열상으로 피가 낭자했다.
하지만 치과에서는 치아가 빠지거나 턱뼈가 골절되는 등 경조직(딱딱한 조직)의 상처를 더 크게 다친 것으로 본다.
이 경우는 최소 전치 4주에서 6주까지 진단이 가능하다.
하지만 입술이나 점막 등이 찢어지는 연조직(부드러운 조직)의 상처는 전치 2주 이상 나기가 힘들다.
치아가 부러져도 빼지 않고 신경치료로 살릴 수만 있다면 전치 2주다.
다행히 이 환자는 방사선 검사를 해보니 턱뼈 골절이나 치아 탈락 같은 경조직 이상은 없었다.
부모 눈에는 입술이 찢어지고 피가 나니까 끔찍해 보여도 심각한 부상은 아니다.
상처를 잘 세척하고 소독한 뒤 지혈을 위해 찢어진 구강 점막과 입술을 봉합하였다.
그러나 입술 밖의 안면부 피부 열상은 봉합하지 않고 성형외과로 보냈다.
근육의 주행방향에 따라 흉터가 생기지 않게 봉합하는 기술이 필요한 거다.
조폭 두목의 용 문신을 맞추느라 봉합하는데 진땀을 뺐다는 우스개 소리도 있듯이 흔적없이 감쪽같이 원상복구를 시켜야 한다.
더구나 이 환자의 경우는 다른 데도 아니고 얼굴 부위가 아닌가.
엄연히 성형외과의 영역인 거다.
통영에서 공중보건의 근무를 할 때는 이와 정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당시 의과 공보의가 자주 자리를 비웠었는데 마침 귀가 찢어진 응급 환자가 찾아왔다.
의사라고는 나 밖에 없었기에 어쩔 수없이 치과의사가 소독하고 봉합하는 외과의사 역할을 해야만 했다.
얼마 전엔 단골 이용원에서 이발을 하는데 배경처럼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의학상담을 하고 있었다.
마침 치주염에 관한 내용이라 귀를 기울이고 있자니 내가 모르는 생소한 이론과 용어가 나온다.
거 참 공부를 더 해야 하나 싶었는데 상담의사가 한의사였다.
치과 질환을 한방으로 설명하니 내가 이해를 못 했던 거다.
사실 요즘 TV에서 하는 치과상담은 거의 다 임플란트에 관한 것 뿐이다.
다양한 치과질환에 대한 얘기는 이제 한의사한테 들어야 하나 싶다.
한의학에선 치과질환을 어떻게 치료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턱관절 질환을 한의원에서 치료한다는 얘기는 들었다.
입 안의 본을 떠서 스플린트라는 교합 안정 장치를 제작해 장착하는 전형적인 치과 치료를 한의원에서 하고 있다니 의아할 따름이다.
정형외과와 한의원에서 관절염을 물리치료로 유사하게 치료하듯 턱관절 질환도 일종의 관절염이라는 맥락에서 한의원에서 치료하는 것이 합법인가 보다.
비단 의학 분야뿐만 아니라 현대 사회는 모든 공정과 프로세스를 단계별로 세분화해서 전문화하니 세상은 온통 전문가들로 넘쳐난다.
좁지만 깊게 해당 분야를 파고들어 연구를 하니까 학문의 발전을 이루긴 하겠지만,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정확히 어떤 전문가를 찾아야 할지 아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결과가 좋으면 다들 전문가 티를 내지만 결과가 나쁘면 오히려 자기 전문분야가 아니라며 책임을 회피하는 핑계를 대기 좋다.
불의를 보면 못 참는 아내는 어떤 문제점이나 부조리한 점을 발견하면 관할 관공서에 민원을 종종 넣곤 한다.
그런데 전화를 하면 사안에 따라 이쪽 소관이 아니라며 다른 곳을 연결해 주고 그쪽에선 다시 다른 쪽 소관이라며 자꾸 미루고 돌리기만 하더란다.
과정을 아주 잘게 세분화해 놓을수록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데는 효율적이다.
요즘은 사라졌지만 과거엔 동네 전파상 사장님은 테레비든 밥솥이든 선풍기든 라디오든 하여간 뭐든지 고장 나면 척척 수리해 내는 만물박사였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듯이, 전문가가 많은데 일처리는 왜 더 더딘지 알 수 없다.
너와 나의 전문분야가 어떻게 칼로 무 자르듯 명확히 나눠질 수 있겠나.
다소 겹치는 교집합은 자기 밥그릇만 챙기지 말고 융통성 있게 협력하고 아우르는 통섭의 지혜가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