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진실
실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케이스를 두 개를 붙여놓고(서로 볼 수 있지만 다른 쪽으로 넘어갈 수 없게 막혀있다.) 각각의 케이스에 원숭이를 한 마리씩 넣는다. 왼쪽 케이스에 있는 원숭이에게 돌멩이를 하나 주고, 그 돌멩이를 돌려받으면 오이 하나를 대가로 교환한다. 이후 오른쪽 케이스에 있는 원숭이에게도 똑같이 돌멩이를 주지만, 교환의 대가는 오이가 아닌 포도 한 알이다. 원숭이는 오이보다 포도를 더 좋아하기에 오이를 받은 왼쪽 원숭이는 화를 표출한다. 실험자는 그 과정을 몇 번이고 똑같이 반복을 했고 결국 오이만 받은 쪽의 원숭이는 오이를 집어던지곤 교환을 포기하며 실험은 종료된다. 이를 통해 ‘원숭이는 본능적으로 불평등을 혐오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라는 결론이 도출되었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인간 사회의 복잡한 감정과 도덕적 판단은 단순 비교로 환원되지 않는다. 하지만 어느 정도 비슷하게 흘러간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불평등을 본능적으로 혐오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불평등에서 우위를 점하는 쪽이 되면, 대부분 불만을 표출하기보다 침묵을 선택하며 거기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지 않는다. 물론 일종의 동정심이 생길 수 있지만, 그 동정심의 근원은 절대 불평등에 대한 혐오가 아니다. 나는 오히려 주변의 위협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방어기제의 일종이라 보고 있다. 우리는 불평등을 정말로 혐오하는 것인가. 어쩌면 우리는 우리보다 상대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우위를 점했다는 사실이 분한 것이지 않을까. 세상에 사람들은 많고, 그 사람들의 생각 하나하나 정말로 다르겠지만 나는 갈림길의 후자 쪽인 사람이며 결국 인간적 본능에 의해 그 사실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마주할 때 침묵하게 된다. 그 마음은 분명 잘못된 마음이다.
불평등은 비단 돈의 문제만은 아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평등은 태어남과 죽음. 두 가지뿐이다. 그것의 근원은 결국 상대성인데, 가장 무서운 점은 사람이 느끼는 감정에 대해서도 불평등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일례로 전쟁이 터진다는 뉴스가 세간에 돌면, 가장 먼저 유튜브에서 전운이 고조되는 지역의 cctv 영상을 라이브로 몇 시간이고 틀어준다. 이윽고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하는데 그들은 언제까지고 흥미롭게 미사일이 날아오거나 공습경보가 터지기를 기다린다. 안전한 곳에서 말이다. 오히려 그들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음에 분노한다. 마치 공포영화를 보는데 그것이 기대만큼 스릴 넘치지 않았을 때 실망하는 것처럼 누군가의 안정감조차 평등하지 못하며, 그것이 변질되고 또 부패하여 타인에게 이용되고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결국 자본주의 사회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통해서 무너진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결국 상대적인 것은 상대적이다. 그 논리에 의하면 노동자의 혁명 같은 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다. 내가 타인보다 조금의 우위를 전하고 있다면, 분명 그 사람은 동조보다는 침묵을 선택할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같이 혁명에 동참한다고 하면, 그것은 새로운 사회, 기존의 사회가 무너지며 생겨나는 기회의 장에 대한 기대일 것이며 결국 불평등에 대한 혐오심에서 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세상은 평등을 지향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묻고 싶다. 정말로, 세상이 원하는 것은 모두가 평등한 사회일 것일까? 만약 모두가 평등한 사회가 만들어진다 해도, 또 다른 불평등이 생겨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는가.
왜 부와 가난은 대물림되는가?
왜 일하는 시간과 거기에 따른 보상은 비례하지 않는가?
왜 누구는 피를 흘리며 싸우고 누구는 평화로운 세상에서 살아가는가?
왜 우리는 끊임없이 타인과 나를 비교하며 기뻐하고 슬퍼하는가?
언제부터 행복의 기준이 상대적으로 변질된 것인가?
그리고 이제 불평등은 죽음과 삶의 영역까지 개입된다. 어쩌면 그것은 오래전부터 잠식되어 왔을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건강한 신체는 돈으로 환산되기도 하고 그것을 통해 누군가의 생명은 연장된다. 이것은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며, 나는 그런 소식을 접할 때마다 소름이 돋는다. 그러니 거기에서 느껴지는 나의 혐오감은 오직 순수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기를. 결국 불평등한 세상은 우리가 원했던 것이 아니기를. 세상 모든 삶의 원동력이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믿으며, 침묵하지 않는 것으로 세상의 모든 불편한 진실을 부정할 수 있는 것.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마지막 양심일 것이다.